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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이 책을 읽은 건 어느 가을이었다. 겨울이었나. 그 사이의 계절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서교동의 어느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이따금 얼어붙은 손가락을 허, 하, 호, 불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카페 내부는 특별히 시끄럽지도 붐비지도 않았으며 좌석이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밖에서 덜덜 떨어가며 독서를 한 이유는 이 책이 그런 책이어서. 그런 환경에서 그런 모양새로 읽어야만 하는 책이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조르루 페렉의 『사물들』을 뭐랄까 전반적으로 불쌍한 책으로 기억하고 있다. 비단 내가 불쌍했던 시절에 읽어서는 아니고, 이 책을 쓴 저자가 현대인의 필연적 좌절을 그것참 딱한데 뭐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다는 듯 난처하게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그려내서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까 너뿐 아니라 이 이야기를 쓴 나 역시도 이 모양 이 꼬라지여서 무슨 위로를 건네고 자시고 할 입장도 아니고 방법도 없으니 우리 그냥 살아볼까, 버틸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달까. 나는 이 책을 그런 몸짓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한 태도와 그러한 천연덕스러움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기억하나.
의문을 품은 채 오랜만에 다시 이 책을 꺼내 들었다. 포스트잇을 붙여놓은 부분들을 펼쳐서 읽고, 또 읽어보았다. 그러면서 아 이 책은 1960년대의 프랑스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사회학적 소설이라고 불리면서도 2016년의 한국을 재현한 소설로 발표해도 무리가 없으니 몇 년 전 이걸 읽었던 나와 지금 다시 읽고 있는 내가 여전히 비슷한 강도로 위태롭고 허영을 좇으며 실패하는 것은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구나, 보편적 삶의 양식일 뿐이로구나, 그렇다면 위로할 수 없는 게 맞지, 누가 누굴 위로해, 하게 되었다.
누가 누굴.
그러고 나니 이 한 몸 역시 알아서 건사해야 하는 건가 싶어 쓸쓸했고, 다들 이런 식으로 아등바등 살다가 분투하다가 막판에 잘 차려진 성찬 앞에서도 왠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면 뭐하러 버티나, 왜 사나 싶은 감정을 느꼈다. 필연적으로 좌절할 수밖에 없다면 왜.
왜라니.
어쩌면 그걸 묻기 위해 사는 걸지도.

노답인 줄 알면서도 그저 질문을 던지기 위해, 호수에 돌멩이를 던지는 심정으로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을 덮었을 때 막연히 떠올리게 되는 저자의 모습이 여전히 입술을 비죽 이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듯해서. 만난 적도, 만날 수도 없는 곱슬머리의 조르주 페렉이 내가 이 책을 읽는 내내 곁에 앉아 짐짓 걱정해주는 듯한 목소리로 봐라 한심하지 바보 같지 그래도 뭐 어쩌겠냐 다들 이러고 살았어, 살고 있고 살 게 될 거야 영원히, 하는 듯해서다. 그렇게 체념한 듯 의연한 듯 이 세계와 결탁하는 듯 그러나 은밀하게 보복의 칼날을 품고 있는 듯한 페렉의 몸짓이 압도적이어서. 그래, 이런 몸짓. 그러나 다시 읽어도 전반적으로 불쌍한 책이라는 인상은 여전했고, 그것은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내릴 역을 확인하고 문 앞에 서 있다가 문득 마주하게 되는 나의 모습, 그것을 볼 때의 느낌과 같았으므로 당연했다.

그래서 이 책은 추천하고 싶으나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읽어도 좋으나 읽지 않아도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읽으나 마나 한 책은 아닐 것이다. 읽었다면 기억할 수밖에 없는 책이고, 읽을 때마다 울컥할 수밖에 없는 책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그것참 어쩌나 싶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이 느끼나 마나 한 감정은 아닐 것이다.

사물들
지은이 조르주 페렉
옮긴이 김명숙
출간 정보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03
원제 Les Choses(2015)
스물을 갓 넘은 실비와 제롬이 사회에 진입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소설. 이 작품은 사회학적 보고서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사회상을 압축적으로 묘사하는 한편 도시적 감수성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해낸 수작이다. 작품은표면상 주인공들이 갈망하는 물건들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행복에 대한 긴 담론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사회인 현대 소비사회는 중세에는 왕들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풍요로움을 보통 사람들에게 안겨주었다. 하지만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소비에 대한 욕망은 더욱 심해졌다. 페렉은 스물을 갓 넘은실비와 제롬이 학생 신분을 벗어나 사회에 진입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현대인이 시달리는 상대적 빈곤감을 날카로운 필치로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조르주 페렉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그해 1965년 르노도 상을 받음으로써 모두에게 스물아홉의 신인 작가를 각인시켰다. 페렉은 클래식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지극히 현대적이며, 소설적재미를 잃지 않는 감각적인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페렉이 사회학도였다는 사실은 ‘사물들’에‘사회학적 소설’이라는 꼬리표를 달지만 더 나아가, 페렉은 사회비판적, 분석적인 작가라기보다 사회의 하부구조, 일상을 기술한 한 세대의 기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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