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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지내는 수의사 선생은 종종 인간만이 지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코끼리를 예로 든다. 선생에 따르면 코끼리는 무리 중 한 마리가 죽으면 시신 앞에 모여 작별인사를 건네고, 나중에 그 자리를 지나게 되면 코로 백골을 쓰다듬어준다고 한다. 물론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애도한다고 무리 지어 있다가 사냥꾼의 눈에 띄면 어떻게 하느냐고. 생각해보면 제의는 생존에 딱히 도움이 안 되는 일이다. 뚜렷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망자가 그 사실을 알아줄 거라는 법도 없을 테니. 하지만 어쩌면 그 덧없음이야말로 사회적 지능의 징표일지 모른다고, 수의사 선생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대상을 그냥 두고 떠날 수 없어 애도의 제의를 표하고자 하는 존엄에 대한 덧없는 집착. 그 집착이 다른 동물과 지적 존재를 가르는 증거는 아닐까.

<사울의 아들>(2015) 속 사울 또한 그랬으리라. 이미 죽은 아이니 미련을 버리라고 만류하는 매정한 목소리들 뒤에는 생존을 위한 나름의 합리가 있다. 어떻게 수용소 안에서 독일군의 눈을 피해 장례를 치러줄 것이며, 방도를 찾는다 해도 무리하게 시도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 왜 꼭 장례를 고집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사울은 멈추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제 아들의 애도마저 포기하는 건 존엄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슬픔을 대놓고 표현할 수 없어 무표정 뒤로 꾹꾹 눌러 숨긴 사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2012)을 떠올렸다. 사울이 있던 아우슈비츠에서 10,357km 떨어진 인도네시아를 배경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비극을 목에 걸린 가시처럼 앓고 있는 이들이 떼로 등장하는 참혹한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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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에 의해 자행된 정적 학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 했던 오펜하이머는 자료조사에 착수한 이후 일이 뜻처럼 풀리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100만 명이 넘는 지식인, 반정부인사, 화교 등이 공산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살해당했지만, 나치와 달리 인도네시아의 학살자들은 여전히 요직에 앉아 아무 심판도 받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오펜하이머는 증언할 수 없는 피해자 대신 가해자들에게 카메라를 쥐여 주는 쪽으로 프로젝트를 선회했다. 술과 약물, 춤으로 학살의 악몽을 잊으려 발버둥 친 왕년의 학살자이자 영화광인 노인 안와르 콩고를 찾아가 “당신 입장에서 당시를 재현한 영화를 찍어보라. 나는 메이킹 필름을 만들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이를 통해 학살자는 제 손에 묻은 피를 과연 어떤 식으로 정당화하는지를 관찰한다.

안와르와 동료들이 모여 “다음엔 어떤 장면을 찍을까” 회의하는 대목, 재연 배우로 동원된 마을 남자가 웃으며 입을 연다. “진짜 있었던 이야기 제가 알아요. 어떤 가게 주인이 있었는데, 마을에서 화교는 그 사람 하나뿐이었죠. 실은 제 양아버지였는데요.” 남자는 자신의 양부가 끌려간 다음 날 사체로 발견되었고, 겁에 질린 동네 사람들의 외면 속에 조부와 둘이서 “대로 옆에 무슨 염소 묻듯” 양부를 묻고 와야 했던 열한 살 무렵의 기억을 들려준다. 심지어 연신 웃어가며 어색함을 무마하는 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남자다. “전 우리가 하는 일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냥 서로를 더 잘 알면 좋잖아요.” 그러나 다음 장면, 아버지가 50년 전 당했을 고문을 재연하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살려달라 울부짖는다. 생존을 위해 애도도 분노도 할 수 없었던, 인간 이하이길 강요당했던 서러움이 재연 연기의 탈을 쓰고 터져 나온 것이다.
왜 어떤 죽음은 합당한 애도를 받지 못한 채 침묵 속에 잊혀지는가. 하물며 코끼리조차 동료의 백골을 접하면 코로 쓰다듬어 주는데. 어쩌면 침묵을 강요당한 사울의 얼굴을, 학살자들 앞에서 웃어 보여야 했던 남자의 오열을 목격한 이들에겐 그 광경을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며 대신 애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생존에 딱히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닐 것이나, 오직 그럼으로써만 인간일 수 있을 테니까.

액트 오브 킬링(2014)
The Act of Killing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 신혜수
시놉시스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 당시 군은 ‘반공’을 명분으로 100만 명이 넘는 공산주의자, 지식인, 중국인들을 비밀리에 살해했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 대학살을 주도한 암살단의 주범 ‘안와르 콩고’는 국민영웅으로 추대 받으며 호화스런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들의 ‘위대한’ 살인의 업적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온다.“당신이 저지른 학살을, 다시 재연해보지 않겠습니까?”대학살의 리더 안와르 콩고와 그의 친구들은 들뜬 맘으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도 하며 자랑스럽게 살인의 재연에 몰두한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되면서 대학살의 기억은 그들에게 낯선 공포와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영화는 예기치 못한 반전을 맞는다.

전대미문의 방법으로 인간의 도덕성을 뒤흔드는 충격의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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