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년 시절을 연결하는 노래
1975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집은 어찌어찌해서 시내버스 9번 종점이 있던 서울의 제일 끝자락 우이동으로 이사를 했다. 골목 양옆으로 기계로 찍어낸 듯 똑같이 생긴 집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의 방 두 개짜리 반지하가 우리 집이 되었다. ‘응답하라 1988’의 봉선이네 집의 절반 수준이라고 상상하면 된다.
집은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늘 눅눅했고, 집안 분위기는 엉망이었고, 나는 번데기 국물 때문에 친구와 싸우다 손이 부러져 깁스한 상태였고, 엄청나게 떨어진 중간고사 성적 때문에 잔뜩 겁에 질려있었고, 기말고사는 다가오고 있었다.
윗집 주인은 대학교수였고, 사모님은 기타를 치셨다.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다 들킨 내게 사모님은 기타를 배워보겠냐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인에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두운 우리 집과는 달리 햇빛이 가득한 주인집에서, 사모님과 단둘이, 물론 기타를 중간에 두고, 마주 앉아있으면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사모님은 기타를 치며 속삭이셨다.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사모님은 홈드레스를 자주 입었다. 코드를 바꾸느라 고개를 숙이시면 드레스의 윗부분도 밑으로 내려갔고, 내 눈도 함께 따라 내려갔다.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몇 번은 들키기도 했다. 그러면 사모님은 입꼬리를 약간 올리시면서 나에게 기타를 건네주셨다.
손가락 끝이 아팠고 물집이 생겼다. 사모님은 참고 계속하면 아프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몇 번 물집이 더 터진 후에는 정말 아프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아픔도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느껴지지 않음을 배웠다. 사모님의 인도로 나는 팝송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라디오와 함께 사는 아이가 되었다.
그해 초여름 집주인 교수가 어린 여학생과 바람을 피웠다. 기말고사가 임박한 어느 오후 그 여학생이 집으로 왔고, 사모님은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고 골목을 휩쓸며 통곡을 했다. 그렇게 아름답던 사모님은 무서운 아줌마로 변해있었다. 여학생은 울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반지하의 창문을 통해 왁자지껄한 구경꾼 아줌마들의 다리 사이로, 헝클어지고 피 흘리는 여학생의 모습을 보았다. 드러난 그녀의 검은색 속옷이 보였다. 공부해야 했지만, 그래서 졸업식 때 우등상을 타야 했지만,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그때 라디오에서 10CC의 ‘I’m not in love’가 흘러나왔다. 늘 모호하게 답답하고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전주였다. 그 전주가 끝나면, “나는 사랑하지 않아!”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그래서 슬픔과 고통을 회피하려는 발버둥이 시작된다. 답답하고, 슬프고, 두렵고, 회피하고 싶으면서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은 오후였다.
‘I’m not in love’는 나에게 사랑 혹은 삶이라는 비극에 대한 두려움, 도망칠 기회를 잃은 무력감 혹은 절망감이다.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내 머리에서는 자동으로 ‘I’m not in love’가 재생된다.
사람들은 강한 감정을 유발하는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들었던 소리나 배경음악을 그 감정과 연결시켜 저장하고, 그 감정을 유발하는 사건을 겪거나 기억할 때 그 소리나 노래를 듣게 된다. 전쟁의 포성이나, 연인에게 버림받을 때 찻집에서 흐르던 노래처럼….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이렇게 좋은 노래와 평생 연결되어 있을 것이니까.
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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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창기 밴드 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