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82%ac%eb%9e%91%ec%9d%98%ec%97%ad%ec%82%ac
『사랑의 역사』는 레오 거스키가 청년이었을 때 사랑하는 알마를 위해 이디시어로 쓴 책이다. 알마를 위해 작은 글씨체로 이 책을 꼼꼼히 베껴 보내기도 한다. 거스키가 죽었다고 믿은 친구 즈비는 이 책을 남몰래 스페인어로 베껴 써 출판한다. 시간이 지난 뒤 헌책방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한 다비드라는 청년은 책의 사연은 조금도 모르는 채로 사랑하는 샬럿에게 이 책을 선물했고, 두 사람은 딸을 낳아 알마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번역가인 샬럿은 다시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여러 번씩이나 옮겨 쓴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매개로 폴란드 출신 팔십 대 노인 레오 거스키, 그리고 고작 열다섯 살 미국인 소녀 알마가 연결되고, 사랑의 역사를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이 이야기에 다시금 『사랑의 역사』라는 제목이 붙는다.

내가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를 처음 읽은 것은 내가 번역가가 되기 전, 영어사전을 펼쳐놓고 “Knee, Elbow, Ear.” 하고 조심스럽게 서로를 탐구하던 레오와 알마처럼 더듬거리며 영어를 읽어 내려가던 때다. 그래서 이 책은 처음으로 내가 끝까지 읽은 영어책이면서, 처음으로 끝까지 혼자 번역해 본 책이기도 하다. 아무도 모르는 멋진 책을 (그때까지는 이 책이 미국에서 그해 최대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발견했다는 기쁨 때문에, 무엇보다도 나 역시 이 책에 나오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알마’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조용히 베껴 쓰기 시작했다. 얼마 후 한국어 번역본이 정식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내가 서툴게 옮긴 나의 『사랑의 역사』는 오랫동안 즈비의 서랍 안에, 아르헨티나의 헌책방에 잠들어 있던 그 책과 마찬가지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읽은 사적인 책이자 가짜 번역본이 됐다.

그러니까 내가 팔십 대 노인 레오폴드 거스키를 알게 된 것, 쓰레기로 가득찬 방 안에서 힘겹게 걸어 다니며 자신이 죽은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은 누굴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십 년 전의 일이다. 늙는 일, 죽어가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생각했고, 팔십 년 치의 슬픔이 심장을 내리누른다는 것, 그리고 그 슬픔을 버티기에는 심장이 지나치게 연약하다는 것, 그래서 강렬한 감정들을 쭈글쭈글한 몸 안에 들어 있는 다른 기관과 내장으로 보내서 심장 대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기분인지, 어째서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그만큼이나 슬퍼지는지 조금도 모르던 때의 일이다.

사랑이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모르던 때의 일이다. 그 뒤로 십 년 동안 사랑이 반복된다는 것을 천천히 알게 됐다.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이상한 일을 한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쓰거나, 내가 쓰지 않은 책을 가지고 작가 행세를 하거나, 겁도 없이 낯선 사람을 찾아다니거나, 혼자서 늙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이 막연하고 이상한 사랑이 어떤 개인의 삶이나 혼자서 써내려가 몰래 간직한 책의 범위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로 확장되는 바람에 낯선 사랑의 역사에 끼어들게 된 것을 뒤늦게 알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은연중에 나는 가짜 책이 아니라 진짜 책을 만드는 번역가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사랑의 역사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역사
지은이 니콜 크라우스
옮긴이 한은경
출간 정보 민음사 / 2006-08
원제 The History of Love(2005)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둘러싼 미스터리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2002년 데뷔한 작가 니콜 크라우스는, 수잔 손택을 비롯한 여러 문학 평론가들로부터 ‘미국 문학사’의 떠오르는 별이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첫사랑 알마 메레민스키를 찾기 위해 폴란드를 떠나 미국을 찾은 유대인 레오 거스키와, 레오의 첫사랑과 이름이 같은 알마 싱어라는 10대 소녀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소녀 알마의 엄마 샬럿은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하고 일에 파묻혀 사는 번역 작가다. 알마의 남동생 버드는 자기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80대 노인 레오와 사춘기의 첫사랑을 감당해야 하는 알마, 그리고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의 삶은 모두 <사랑의 역사>라는 아름다운 소설에 의해 영향을 받았거나 시공을 초월하여 서로 연결된다.
%ec%82%ac%eb%9e%91%ec%9d%98%ec%97%ad%ec%82%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