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어둡고 넓은 하늘을 찾아가는 노력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 손바닥만 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별이 보인다. 어쩌면 인공위성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냥 별이라고 믿고만 싶은 희미한 불빛 몇 개가 까만 하늘에 흰 점처럼 박혀있다. 도시에서도 별은, 보인다.
밤하늘을 올려다본 적 있다.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 바다처럼 넓은 하늘이 눈 앞에 펼쳐진 적 있다. 별이 보였다. 하늘에서 별이 아닌 부분을 찾는 게 더 빠를 만큼 별이 많았다. 온 천지에 별이었다. 그래서 ‘별천지’라는 말이 생긴 거야, 막 우기고만 싶던 밤. 도시가 아닌 곳에서도 별은, 보였다. 아니, 정정한다.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땅에서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별이… 쏟.아.진.다.
극장에 앉아 영화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를 보면서 나는,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국립공원 4박 5일 트레킹의 밤들을 떠올렸다. 내 생애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여정. 살면서 하늘에 가장 가까워진 나날. 어마어마하게 많은 별이 매일 매일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던 밤들의 행렬. 풍경은 황홀했고, 자연은 위대했으며, 나는 초라했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 손바닥만 한 하늘만 올려다보아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 바다처럼 넓은 하늘을 올려다보아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이 세상의 어떤 비밀 하나를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왠지 횡재한 느낌이 들었다. 한 주먹 움켜쥔 건빵 사이로 별사탕 하나가 삐죽 얼굴을 내밀 때처럼. 훗날 극장(!)에 앉아 영화 <레버넌트>를 보며 슬며시 미소 짓던 그 날의 바로 그 기분처럼.
<버드맨>(2014)으로 지난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레버넌트>를 만들며 세 가지 무모한 원칙을 세웠다. 첫째, 시나리오의 시간 순서대로 촬영한다. 둘째, 인공조명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햇빛과 불빛만을 사용한다. 셋째, <버드맨>처럼 하나로 매끄럽게 연결된 롱샷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완성된 영화엔 과연 놀라운 순간들로 가득하다. <그래비티>(2013)와 <버드맨>으로 2년 연속 아카데미 촬영상 받은 엠마뉴엘 루베즈키의 황홀한 영상, <마지막 황제>(1987)로 아카데미 음악상 받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세련된 음악, 여기에 무시무시한 열연을 선보인 두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톰 하디의 연기까지. 상영시간 156분 내내 진정한 프로페셔널들의 열정과 재능이 화면 가득 차고 넘친다.
6주 예정 촬영 기간을 9개월로 늘려 가면서, 6천만 달러 예산의 두 배를 쏟아부으면서, 그렇게 3개국 12곳의 로케이션을 떠돌아 다니면서, 기어코 적지 않은 스태프들이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심지어 채식주의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소의 생간을 잘근잘근 씹어 삼켜 가면서! 한 마디로, 미친 인간들이 미친 열정으로 만들어낸 미친 장면들로 영화가 가득 채워졌다.
극장에서 보지 않아도 보일 것이다. 나중에 TV로도, 스마트폰으로도 보일 것이다. ‘아들 잃은 아버지의 복수극’, 혹은 ‘극한의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낸 한 인간의 서바이벌 드라마’. 물론, 다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결코 다 보지 못할 것이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 손바닥만 한 하늘만 올려다 보아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 바다처럼 넓은 하늘을 올려다 보아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이 세상의 어떤 비밀 하나를 알아버린 기분. 왠지 횡재한 기분. 꼭 그와 비슷한 어떤 근사한 느낌을 TV 앞에 앉아서는 끝까지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모니터에서도 <레버넌트>는, 보인다. 극장에서는 <레버넌트>가, 보이지 않는다. 큰 스크린 앞에 앉은 나를 향해 이 영화는… 쏟.아.진.다. 그냥 ‘보이는’ 화면이 아니라 차라리 ‘쏟아지는’ 스크린으로 이 영화를 마주할 때라야 비로소, 풍경은 황홀하고 자연은 위대하며 인간은 초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인공 휴 글래스의 ‘사건’만이 아니라 그의 ‘시간’을 온전히 체험해야만 <레버넌트>는 당신에게 쓸모 있는 영화가 된다. 휴 글래스가 감당해야 하는 추위와 바람과 배고픔과 두려움을 멀리서 ‘구경’하기보다 다가가 ‘체험’하려 애써야만 러닝타임 156분의 쓸모가 생긴다. 그러려면 꼭 극장에서 보아야 한다.
세상엔 그런 종류의 영화가 있다. 하늘의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탓하기 전에, 일단 더 어둡고 넓은 하늘을 찾아가는 노력이 굳이 필요한 영화. 그런 수고가 아깝지 않을 만큼, 특별히 근사한 장면과 각별히 생생한 에너지로 그 하늘을 가득 채우고서 우리를 기다리는 영화.
<레버넌트>가 바로 그런 영화다. 우리는 왜 극장에 가야 하는가? 이 삐딱한 질문에 대해 가장 단호하고도 자신만만한 대답이다.
The Revenant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톰 하디, 돔놀 글리슨
시놉시스 서부 개척시대 이전인 19세기 아메리카 대륙, 사냥꾼인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아들 호크를 데리고 동료들과 함께 사냥하던 중 회색곰에게 습격 당해 사지가 찢긴다. 비정한 동료 존 피츠 제럴드(톰 하디)는 아직 살아 있는 휴를 죽이려 하고, 아들 호크가 이에 저항하자 호크 마저 죽인 채 숨이 붙어 있는 휴를 땅에 묻고 떠난다. 눈 앞에서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휴는 처절한 복수를 위해 부상 입은 몸으로 존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