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더 보이프렌드>(2024)

길티 플레저 트위스트

제발 이번만큼은 인간을 내려다보지 말자 결심했지만 또또! 시청과 동시에 실패하고 말았다.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연프’ 얘기다. 지난 몇 년간 온갖 종류의 연프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고 지금도 계속해서 컨셉과 포맷을 바꾼 연프가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어느새 인간이 인간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그 사이의 심리 변화, 관계의 이동을 지켜보는 일이 일종의 여가 생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출연자의 말과 행동은 물론이고 살아온 배경, 최신 근황 등이 일상 대화의 흔한 소재가 되었다. 카메라의 존재도, 도합 수십 수백은 될 스태프도 의도적으로 지운 후 캐릭터만 남긴 연프의 관음증적 세계는 당연하게 몰입을 부른다. 관찰 카메라가 모르는 사람을 그 누구보다 많이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니까.

이들 프로그램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며 여기 있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것. 둘째, 혼자 남거나 엇갈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의 매력을 발산할 것. 다만 내겐 연프 편식 문제가 있다. 멋지고 세련된, 한껏 꾸민 로맨스 드라마 같은 몽글몽글하고 뽀샤시한 연출의 연프는 저건 다 판타지고 가짜라고 부정하면서, UHD 화면이지만 왜인지 모르게 너덜너덜하고 열화된 이미지마냥 느껴지는, 주변에 흔히 있을 결혼이 너무나 하고 싶은 조급한 사람들이 가득 나오는 프로그램은 이건 인류학자가 만든 사회 실험이라고, 후세에 분명 2020년대 인간 연구에 쓰일 사료라고 진짜라고 추켜세우니까. 끊어야지 끊을 거야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인간 참 지긋지긋해, 뭔 저런 인간이 다 있어, 저렇게까지 해서 연애 시장에 나를 내던져야해? 그래서 사랑이 뭔데, 방송국 놈들 너무 못됐다 고개를 내저으면서, 언젠가는 촌장이 되어보고 싶다거나 저기 저 패널이 되고 싶다고 엇박자 트위스트 난리부르스를 떨면서, 결국 매번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길티 플레저가 촉발하는 모순은 참으로 힘이 세다.

NETFLIX <더 보이프렌드>(2024)

“난 거짓말투성이 인생을 살았구나”

그런데, 나타나고야 말았다. “사랑하고 싶어졌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연프가. “난 거짓말투성이 인생을 살았구나” 깨닫게 해준 방송이. 내 눈앞의 당신도, 내 안의 나도 똑바로 마주하는 방법을 헤매던 내게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얼리티 시리즈 <더 보이프렌드>는 스튜디오 패널들의 말처럼 “제대로 표현하고, 제대로 상처받고, 제대로 이해한 사람에게 치유되고. 이렇게 살면 되겠다 싶네요”라고, 비꼬기나 흘겨보기 없이 내가 선 자리에서 당신과 눈을 맞춰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해변 아늑한 별장 ‘그린룸’에 직업도, 나이도, 살아온 배경도 모두 다른 9명의 남자들이 모인다. 공통점은 단 하나, 남성에게 끌리는 게이이거나 바이라는 것. 이들은 누군가는 상처받는 게 두려워 도망치기만 했던 로맨스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또 누군가는 서투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 위해 출연을 결심했다. <더 보이프렌드>에는 조건이 한 가지 더 붙는다. 여름 한 달 동안 함께 살며 공동으로 커피 트럭을 운영해야 한다. 커피 트럭은 합숙 생활에 필요한 경비를 버는 수단이면서, 사랑과 우정을 쌓아가기 위해 마련된 조밀하고 친밀한 공간이다. 이와 함께 원래 갖고 있던 직업 생활도 계속해 나간다.

그런 점에서 <더 보이프렌드>의 관계 맺기는 다른 연애 리얼리티와 사뭇 다르게 나아간다. 게이 클럽 댄서, 일본 최고 인기 고고보이로 활동하는 유사쿠에게는 근육 트레이닝이 곧 생계다. 커피 트럭 수입은 예상보다 저조하고, 총무 다이는 하루 약 1만 원으로 제한했음에도 여전히 생활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식재료 닭가슴살 경비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때 요리사 카즈토가 닭가슴살을 활용한 다양한 식사를 만들어 보겠다고 제안한다. 카즈토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이런 순간이다. 가뿐하게 거드는. 슌은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는 데에 거침이 없다. 보는 시청자도 “도대체? 어째서?”를 외칠 만큼 간혹 그린룸의 분위기나 마음에 드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얼어붙게 만든다. 그럴 때마다 태헌은 따뜻하게 조언한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사과하는 법을. 고심 끝에 털어놓은 만큼 슌도 성장한다. 소동은 그뿐이다.

“상대방이 자신을 받아 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껍데기를 깨고 나온다거나 누군가를 믿는 게 두려워” 본심과는 다르게 행동할 때, 그게 사실은 나를 받아달라고 확인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는 걸 솔직히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여전히 동성애자를 향한 편견으로 가득한 사회에서는 더군다나. 이 프로그램은 인간의 그을리고 비천한 면을 왜곡해 클로즈업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 덕에 조금씩 나은 사람이 된다. 한자 사람 ‘인(人)’자는 한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기댄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되새기는 순간이다. 그렇게 이 프로그램은 크고 작은 갈등에도 파국을 파국으로, 가십으로, 소문으로, 흘겨봄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서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조언하고 매듭짓고 포옹한다.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앞둔 태헌의 고민에 알란은 말한다. “아이가 부모에게서 배울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모가 아이에게서 배울 점도 많거든. 부모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 될 수도 있는 거고. 네 선택이 부모님에게는 중요한 메시지가 될 거라고 생각해사랑의 형태는 다채롭고, 각자의 속도가 다른 것뿐. 나는 이 상냥함에 녹아들었다. 마침 다음 회차 업데이트를 손꼽아 기다리던 7 18, 동성 동반자도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한국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계기로 한 걸음 크게 내디딘 법원의 판결에 기뻐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동료 시민이자 앨라이(Ally)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평등한 관계 맺기, 힘 보태기, 지지하기. 그리고선 (S#arp)’ 노래가까이를 흥얼거렸다. “가까이 가까이 더 가까이 날 사랑한다면 오직 나와 함께 어려운 용기도 필요 없어 가장 큰 소리로 날 사랑한다고 말해 줘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목청껏 부르고 싶어졌다.

NETFLIX <더 보이프렌드>(2024)

“키스해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다고 <더 보이프렌드>가 한없이 슴슴한 프로그램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당연히 그 안에는 사랑의 열망과 육체적 흥분으로 타오르는 불꽃도 있다. 언젠가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한국인은 키스 민족임. 드라마 클립 조회수 순으로 봐보셈, 키스신은 기본으로 100만 뷰 넘음. 드라마가 키스신 하나 보고 달려감. 요즘 드라마는 2분짜리 키스신 클립 만들라고 찍는 것 같음” 이 얘기를 들은 날, 주인공 둘이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하면 급격히 재미를 잃고 시청 포기도 서슴지 않는 내가 놓친 게 바로 이런 통찰력이다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거 아시나요? tvN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 키스신 클립은 2024년 8월 중순 기준으로 유튜브 조회수 3.4억 회 그 이상을 기록 중이다… 그렇다… 여러분이 모르는 사이 키스는 한류의 중심에 있다…) 아! 맞다, 그치. 한국인은 키스 민족이지… ‘뽀갈’, ‘키갈’을 격렬히 외치며 둘의 입맞춤을 스포츠 경기 보듯 응원하잖아. 입술이 포개어질 때 사랑은 완성된다, 프로그램 화제성도…

<더 보이프렌드> 3. 슌이 입을 연다. “솔직히 키스 같은 걸 해 보면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당신을 향한 내 마음이 진짜인지 착각인지 아직은 확신이 없으니까. 이 말에 패널 토쿠이 요시미가 스튜디오에서 소리친다. “얼른 해, 해가 지기 전에!” 대화가 한참 이어지고 자연스레 키스 타이밍이 찾아온다. 하지만 슌은 거절하며 말한다. “지금은 안 돼. 내 마음이 진정되면 그때 내가 먼저 할게아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모두가 늪에 빠졌다! 근데 아니 잠시만, 나는 남의 결혼식에서 남들 뽀뽀하는 것만 봐도 낯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는 인간 아니었던가? 내가 이렇게 남의 키스를 바랐던 키스 민족? 그래, 이런 게 바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쥐고 흔드는 스킬배워두면 좋은 거겠지. 일단 메모 메모그래서 슌은 어떻게 됐냐고? 먼저 키스했냐고? ,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건 서막에 불과하다. 서툴지만 멋진 이들의 핑퐁을 따라 눈을 요리조리 굴릴만할 깨알 재미가 숨겨져 있다. 절대로 스포 없이 보시기를 바란다. 누가 누구랑 어떻게 맺어지는지를 확인하는 게 연프 보는 궁극의 재미 아니겠어?

 <더 보이프렌드>(2024)
원제 The Boyfriend, ボーイフレンド
OTT 넷플릭스(NETFLIX)
연출 히시다 케이스케 외
시놉시스
그 여름, 난 그와 사랑에 빠졌다바닷가 별장에 도착한 남자들이 저마다 느낀 첫인상을 이야기한다. 사랑의 불꽃이 튀는 가운데, 새로운 인물이 분위기를 더욱 뜨겁게 달구고, 평생 잊지 못할 여름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