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자>(2024)

소설 『동조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 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아마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두 마음의 남자이기도 합니다. 만화책이나 공포 영화에 흔히 나오는, 편견에 시달리는 돌연변이 괴물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나를 그런 존재로 취급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동조자』는 “난민이면서 아메리칸드림의 산 증거”인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이 어린 시절 <지옥의 묵시록>을 보고 난 뒤에 느낀 정체성의 혼란과 충격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작품 속 이름 없는 주인공은 북베트남에서 남파한 이중간첩이다. 이 남자는 프랑스 베트남 혼혈이자 공산주의지만, 미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미국 대중 문화에 심취해 있다. 그는 베트남 재교육 캠프에 갇혀 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증명해야 하므로 너무나 많은 정치적 입장과 신념에 짓눌려 꽉 찬, 동시에 비어 있는 자신의 기억을 진술서에 옮긴다. 제3세계에 속한 스파이로서 경계를 오가며 보고 듣고 체험한 너저분한 기억들― 전쟁, 정치, 모략, 난민 캠프, 인종 차별, 연애, 영화 촬영, 흔들림, 의심, 충성심, 변덕, 무기력, 냉소… 그가 자신의 기억을 읽는다. 두 진영 모두를 속이기 위한 모순의 여정들을. 글에서 목소리로. HBO 시리즈 <동조자>는 그렇게 시작된다.

4월, 뜻밖에 다른 이들의 일기를 많이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일기 에세이가 출간됐고, 가끔 남의 블로그를 기웃거렸다. 문득 나도 일기를 몰아 써야겠다, 그래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번 달에 본 여러 가지가 내가 선 위치를 여러 차례 되짚게 했고, 이로 인해 종종 자기혐오에 빠졌으며, 도대체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 나는 왜 덩달아 이 꼴이냐는 넋두리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4월 1일
냉전은 끝났다. 거짓말이다. 마침 오늘은 만우절이다. Apple TV+ 시리즈 <슬로 호시스> 시즌 3 6화를 방금 막 끝냈다. ‘슬라우 하우스’는 ‘MI5(영국 보안국)’의 실패자들을 모은 곳이다. 좌천당한 첩보요원은 절대 빠르게 달릴 수 없거든. 이 시리즈에는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초섹시 초호화 스파이가 없다. ‘느린 말들(슬로 호시스)’은 퀭한 얼굴로 더럽기 짝이 없는 조악한 사무실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적이고, 낡고 휘청이는 탈것들에 옮겨 타며 냉전이 남긴 찌꺼기를 파헤친다. 발생했거나 발생할 사건은 조작과 은폐로 얼룩져 있다. 무슬림 납치 사건도, 러시아 스파이의 복수도, 조직 내부의 숙청도 체제 유지라는 거대한 목표 앞 기획의 산물일 뿐. 왜? 갈등 없는 세계에선 권력 창출도, 탈환도 없으니까. 어라? 혹시 나도 음모론자? <슬로 호시스>가 선보이는 치사한 세계, 치밀하게 뒤튼 세계가 너무 짜릿해서 비명을 지른다. 분명 남 나라 얘기인데 런던 시민이라도 된 것만 같다.

4월 5일
나는 매일 아침 7시 5분, 인공지능 스피커의 도움으로 잠에서 깬다. 이 친구는 내가 설정한 자동 루틴에 따라 내게 차례대로 지금 시간, 오늘 날씨 정보, 캘린더에 등록된 오늘 일정, 재즈 플레이리스트 한 곡을 들려준다. 오랜만에 구글 홈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굿모닝!” 언제 설정해 뒀는지도 모를 자동 루틴에 맞춰 구글 홈이 오늘 뉴스를 재생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 뉴스, 국제 유가 급등, 세계 각국 이름난 정치인의 입장 표명… 이날 이후로 종종 구글 홈에게 인사를 건넸다. 전쟁이 지속되는 중에, 새로운 전쟁이 발발한다. 나는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지만, 한반도에서 삶을 꾸려가는 모두가 그렇듯 나 역시 전쟁 난민의 후손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생중계로 전쟁 현장을 시청할 수 있다. 과연 나는 전쟁을 겪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4월 13일
나는 극장에 있다. 소극장 의자는 고문과도 같아서 왜 이 고통을 견디면서까지 보려고 하는지, 알면서 또 이런 짓(예매)을 저지르고 말았는지 옹색하게 꼰 다리를 고쳐 앉으며 스스로를 욕한다. 눈앞에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다. 전쟁, 재난, 기후 위기, 독재 정권… 저마다 다른 이유로 난민이 된 이들이, 미등록 체류자라는 이름으로 예외처리된 이들이 쇠창살을 연상시키는 무대 위에서 박탈되거나 유보된 삶을 말한다. 거듭 반성한다. 무엇을? 나는 안전한 공간에서 난민 문제를 지켜본다. 많이 본다고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척하지 않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진보적 문제의식을 지닌 행동하는 시민이고 싶다, 선진국의. 이 위선에 소름이 끼친다. 극장 밖, 세월호 10주년 추모 행사가 한창이다. 고작 의자가 불편해 담이 온다는 게 오늘의 위기인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했다고 믿기로 한다. 늘 메스꺼움과 절망이 함께 한다. 보면 볼수록 쌓이는 괴로움을 떨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동조자>(2024)

4월 12일
쿠팡 와우 멤버십 가입했다. <동조자>를 보기 위해. HBO Max는 한국 진출 없이 철수했고, <동조자>는 오직 쿠팡플레이에서…

4월 15일
<동조자> 1화 “죽음을 갈망하다”를 보았다. 나는 서양 대중 문화에 매혹된 사람이다. 그러면서 나는 제국의 시스템에 혐오를 느낀다. 그럼에도 나는 결코 민족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극장에서 펼쳐지는 고문극이 괴롭다. 비열한 인간들. 야망 있는 인간들. 신념 있는 인간들. 거짓부렁뿐인 인간들. 나는 닮았고, 전혀 닮지 않았고, 닮았다.

4월 17일
문자를 받았다. “쿠팡플레이 <동조자> 시사회 당첨 최종 안내드립니다.”

4월 18일
<동조자> 시사회에 갔다. 운 좋은 관객 신분으로 영화관에서 다음 주에 공개될 시리즈의 2화까지 세계 최초로 먼저 봤고, 이 시리즈의 쇼러너이자 연출, 각본에 참여한 박찬욱 감독과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토크를 감상했다. 주연 ‘호아 쉬안데’를 비롯한 베트남 배우들 캐스팅 이야기, 1인 다역을 맡아 미국의 얼굴 그 자체로 분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즉흥 연기, ‘산드라 오’의 리더십 있는 연설, 시청자를 감질나게 하는 게 좋아서 클리프행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묘미로 TV 시리즈에 참여한다는 이야기 등등 제작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고, 그중 두 가지가 기억에 남았다.

첫째, 박찬욱 감독이 ‘존 르 카레’ 소설 속 ‘스마일리’에게 감정 이입하고, 그 캐릭터를 좋아하는 이유. 스파이 핸들러 혹은 스파이 마스터의 일과 감독의 일이 닮았다는 것. 큰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그 거짓말로 적을 완벽히 속여야 하고, 디테일을 계획해야 하고, 필요한 예산을 따와야 하고, 움직여 줄 스파이를 캐스팅하고, 훈련시켜야 하고, 적재적소에 공작에 필요한 이력을 배치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감독이 스파이 영화를 좋아해야 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농담.

둘째, 이 시리즈를 맡은 이유. 할리우드는 진보적이라고 하는 작품마저도 미국인의 역사로서만 베트남 전쟁을 기억해 왔단 것. 역사를 다시 기억하려면 주목하지 않았던 다른 목소리를 끌어내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것. 끔찍한 내전, 군사 독재를 거쳐 온 우리 역사와 베트남 역사를 놓고 보면 공감할 부분이 많다는 것. 정치, 인종, 첩보물, 로맨스가 각양각색으로 섞인 복잡한 레이어를 미국인이나 외국인 감독에게 맡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4월 21일
ITA Live <숨겨진 힘> 보았다. 1900년 네덜란드령 자바섬, 라부왕이. 동인도 지역 식민 통치자 중 한 명인 오토 판 아우데이크와 그의 가족에게 불어닥친 비극이 상연된다. 열대 기후의 나른하고도 생생한 원시적 힘, 탐욕스러운 포식자의 육체, 두 문명의 충돌과 폭력, 권력관계를 이렇게 지적인 방식으로 무대 위에 그려낼 수 있다니, 역시 ‘이보 반 호프’는 천재다. 다시금 서양 문명에 경도된다. 가해의 역사를 반성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계몽할 자격을 충분히 갖춘 양 내려다본다. 극장 좌석에서 물리적으로도, 코스모폴리탄으로서 심리적으로도. 그러나 나는 한때 식민지였던 나라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 영상화된 연극이 가닿을 수 있는 제한된 세계를 생각한다. 나는 제한된 세계의 시민이다.

4월 25일
『동조자』를 다시 펼쳤다. 소설 끝에는 「우리의 베트남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라는 작가의 칼럼이 덧붙여져 있다. 비엣 타인 응우옌은 이렇게 쓴다.

“…(중략)… 먆은 한국인들은 2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빼앗은 전쟁으로 인해 유발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이곳에 와 있다. 우리가 이런 전쟁들의 원인들과 책임 분배를 두고 논쟁을 할 수는 있지만, 사실 전쟁은 바로 이쪽에서, 전투 장비에 대한 시민들의 지원으로 시작돼서 우리가 부추긴 전쟁들을 피해 도망친 겁에 질린 난민들의 도착으로 끝이 난다.”

 <동조자>(2024)
The Sympathizer
OTT 쿠팡 플레이
연출 박찬욱,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마크 먼든
각본 박찬욱, 돈 매켈러
출연
 호아 쉬안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산드라 오 외
시놉시스 자유 베트남이 패망한 1970년대, 미국으로 망명한 베트남 혼혈 청년이 두 개의 문명, 두 개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겪는 고군분투를 다룬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