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진섭, [홀로 된다는 것], 1989

방 중앙을 가로질러 피아노가 놓였다. 내 방을 갖고 싶다고 조르자, 엄마는 피아노를 칸막이 삼아 세 살 위인 오빠와 각각 반씩 나눠 쓰게 했다. 오빠 쪽에는 빨간색 트랜지스터라디오가 있었다. 오빠가 고정해 놓은 주파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어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온전한 내 방을 갖게 됐다. 나만의 라디오도. 본격적으로 방에 틀어박혀 주파수를 찾았다. 버튼을 이리저리 돌리다 마음에 드는 목소리나 노래가 나오면 멈췄다. 변진섭은 그렇게 찾아낸 나의 첫 가수였다. 그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올 때마다 공테이프에 녹음했다. 그러다 용돈을 모아 지하상가에 있던 레코드점에 가서 처음으로 테이프를 샀다. 아는 얼굴과 마주칠까 조마조마했다. 마치 무언가를 훔친 사람처럼 단숨에 집으로 달려왔다.

그 시절의 나는 자주 전학생이었고 키가 커서 교실 맨 뒷줄에 앉았다. 단짝 친구를 어떻게 만들고 무엇을 하며 놀아야 하는지 몰랐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피노키오 책상 맨 아래 서랍에는 작은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이 있었다. 그 아래 그의 앨범을 두고 만일을 대비해 다른 물건을 위에 쌓았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가사지를 닳도록 들여다보며 앞으로, 뒤로 감기 버튼을 눌러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밤마다 그가 DJ였던 라디오 프로그램 [가위바위보]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듣다 잠드는 바람에 아침이면 이어폰이 목에 칭칭 감겨 있곤 했다.

어디에서나 그의 노래가 들려오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귀를 쫑긋 세웠고 가슴이 뛰었지만, 티 내지 않았다. [가요톱텐]에 나와도 집중하지 않는 척했다. 가족 중 누군가 채널을 돌려버려도 항의하지 못했다. 그 마음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의 인기는 점차 사그라들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 생긴 단짝 친구가 추천해 주는 노래를 따라 들으면서도 그의 앨범이 발매되면 몰래 구매했다. 특유의 미성으로 부르는 세레나데를 들으며 무엇이 문제인지 고민하기도 했다. 서랍에 처음 담겼던 마음은 아마도 열정과 비슷한 것이었을 거다. 테이프와 CD로 아래 서랍이 채워지면서 그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의리로 변해갔다. 앨범이 나와도 서랍을 채우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했고 나는 더 이상 방안에만 있지 않았다. 현실에서의 사랑은 그의 노랫말과 거리가 멀다는 것도 깨달았다. 타이밍을 한참 놓쳐버린 뒤늦은 고백에 그대가 내게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고 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이어서도 안 된다는 것도.

대학 졸업 후 그가 DJ였던, 내가 밤새 들었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한 방송사에서 작가로 일하게 됐다.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다양한 가수와 노래를 좋아했다.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내 취향을 전시하듯 SNS에 올렸다. 뒷북이 되지 않도록 재빠르게. 트렌디한 음악의 속도를 쫓다가도 그의 노래를 듣게 되면 잠시 멈추곤 했다. 무엇이 다른 걸까. 모두가 그의 노래를 좋아할 때 말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일까. 모두의 관심에서 그가 멀어졌을 때 말하지 못했다는 미안함 때문일까. 그런 날이면 그의 근황을 찾아봤다. 여전히 변함없는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사랑을 시작할 때의 설렘, 지나간 사랑에 대한 미련, 이별에 대한 후회, 그리고 또다시 사랑이 올 거라는 희망을. 왠지 안심되었다.

레트로 열풍과 함께 7080 가요프로그램을 맡게 됐고 그가 출연했다. 어디 좋은 데 가냐는 놀림을 받을 걸 알면서도 원피스를 찾아 입었다. 팔짱을 끼고 사진도 찍었다. 팬이었다는 고백도 했다. 이상하게 허탈했다. 한때 좋아했었다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의 앨범을 품에 안고 숨이 차도록 집으로 달려와 책상 맨 아래 서랍에 꼭꼭 숨겨놓았던 마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 마음을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했다.

그의 독집 앨범 A면 세 번째 곡 <그대에게>로 너무 늦은 고백을 대신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평소와 다를 바 없던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졌던 아침을, 가로수도 온갖 꽃들도 마치 웃음 짓는 것처럼 보였던 기분을, 알 수 없는 감정에 온종일 일렁거렸던 마음을. 노래만은 변하지 않고 그 시간을 기억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