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2023)

극중 예순 살 생일을 맞은 나이애드는 돌연 실패했던 도전을 다시 감행하려 한다. 쿠바와 플로리다 사이의 거친 바다를 종단하겠다는 계획이다. 선수로서 가장 정점이었던 젊은 시절에도 중도 포기를 했을 만큼 엄청난 체력과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도전. 은퇴를 선언한 뒤로 나이애드에게 수영은 일상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이제는 요원해진 과거의 명예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애드는 어머니가 아끼던 메리 올리버의 시집을 읽다가 ‘격정적이고 귀중한 한 번뿐인 삶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시인의 물음에 사로잡힌다. 이윽고 그녀는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보니에게 자신의 원대한 목표를 함께 해달라고 제안한다.

“그 누구도 하지 못한 걸 할 수 있다고 상상해 봐.” 나이애드의 도전은 무모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의 제안은 그 무모함을 뛰어넘을 만큼 달콤했다. 보니와 나이애드는 의기투합하여 100마일이 넘는 쿠바 – 플로리다의 바다 종단 계획을 실행하기에 이른다. 나이애드는 줄어든 근육량을 늘리기 위해 매일 덤벨을 들며 근력 운동을 하고, 공영 수영장 이용객들에게 한 레인을 온종일 전세 내듯 쓴다고 빈축을 사면서도 점차 스트로크의 횟수를 늘리고 물속에서의 호흡을 가다듬는다.

장거리 수영의 관건은 얼마나 빠르게 도착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일정한 리듬으로 물속에 오래 머무느냐에 있다. 길게 팔을 뻗어 물을 휘감을 때마다 그녀는 숫자를 센다. 뭍에서와는 달리, 물속에서는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자칫 조류를 잘못 만나면 내가 움직이고자 하는 방향 같은 건 그저 무색해지기도 한다. 파도가 치는 물속에서 선형적인 움직임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이미 지나왔다고 생각한 지점으로 다시 되돌아가기도 한다는 것. 쉰, 쉰 하나, 쉰 둘, 쉰 셋…… 그녀가 머릿속으로 세는 숫자는 앞을 향하고 있지만, 그녀의 몸은 뒤로 밀리기 일쑤고 제자리에 머물기나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게 정해진 방향도 없이 물이 가는 방향대로 계속 몸을 움직이다 보면 그래도 거칠게 일렁이는 파도 역시 나름의 리듬으로 움직인다는 걸 느끼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자연스레 그 리듬에 안착하다 보면 애쓰지 않아도 어느새 몸의 무게도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가파르던 호흡도 더는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앞으로 가고 있다는 감각보다 물의 안쪽,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듯한 느낌. 마치 폭신한 침구 위에 몸을 뉜 것처럼 출렁이는 물속이 그저 포근하게만 느껴지는 그때, 나이애드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환각 상태에 진입한다. 러너스 하이. 그녀의 수경 너머로 펼쳐지는 갖가지 이미지들은 의식의 세계에서 비롯된 장면들이 아니다. 깊고 어두운 감청색의 바다를 수놓는 환상적인 이미지들 가운데에는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의 장면들이 조각조각 끊어진 채 삽입된다.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과거의 폭력적인 경험은 예순이 넘은 그녀에게 여전히 무르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생존을 위협하는 맹독 해파리처럼. 나이애드는 어느 때보다 편안한 상태로 그 따가운 상처를 다시 직면하고 뒤죽박죽 엉켜 있던 기억을 풀어낸다. 극복도 치유도 아닌, 유속이 쥐여주는 방식으로. 물속에서는 그 어느 것도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고, 가끔은 이미 지나왔다고 생각하는 지점으로 종종 되돌아가기도 하니까.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2023)

시간의 비가역적인 성질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조성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절대량이 눈에 띄지 않는 속도로 차츰 줄어들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달을 때마다 뒤미처 찾아드는 불안은 때로 듬직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하염없이 적어보기도 하고, 원대한 목표를 설정하고는 허송세월하지 않으리라 빈틈없이 빼곡하게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필생의 숙원을 이룬 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것 또한 삶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가치 있는 일에 몰두해왔다는 것에 대한 박수갈채일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의미 있는 일들로만 자신의 생애를 채우지는 못하므로. 나이애드는 다섯 번의 고투 끝에 예순넷의 나이로 종단에 성공했다. 쿠바와 플로리다를 가로지른 종단은 그녀가 최초였다. 나이애드는 정말 남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그러나 실제 성공담과는 별개로, 만일 그녀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다섯 번의 실패한 기록만이 남았다면, 애초에 예순 살의 그녀가 재도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이애드는 한 번뿐인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게 되는 것일까?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들, 이른바 버킷리스트를 해마다 쓴다. 전에 비하면 목록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실패의 경험이 많아졌다는 것과 같다. 실패의 경험이 쌓이는 동안 내가 상상하는 원대함의 크기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없이 줄어드는 것 같다. 어차피 못할 거야, 아마도 안 될 거야,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어…… 따위의 문장 안으로 숨어들어 작고 작아지는 의지와 소망들. 부풀리려고 해도 자꾸만 쪼그라들고 만다. 나이애드의 종단이 유의미한 까닭은 갖가지 변명들로 자신의 원대한 목표를 축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값진 한 번의 성공은 도전을 결심하기까지 버텨온 무수한 보통의 날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격정적이고 귀중하다. 단 한 번뿐이라는 점에서, 또한 온전히 그녀 자신만의 삶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보통의 날들을 보내더라도 각자의 삶은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지니까. 언젠가 나이애드처럼 무람없이 원대한 목표를 세워보고 싶다. 하얀 부표가 달린 안전선 바깥으로 살짝 몸을 기울인다 해도 여전히 같은 물속이니까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 조금 더 가도 된다고, 미리 사둔 내년 다이어리에 슬쩍 적어두려 한다. 목표의 크기가 어떻든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2023)
OTT 넷플릭스
연출 지미 친, 엘리자베스 차이
출연 아네트 베닝, 조디 포스터
시놉시스
수영 전문가 다이애나 나이애드가 60세를 맞아 불가능에 가까운 평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에 나선다. 바로 쿠바에서 플로리다까지 100마일이 넘는 거친 바다를 종단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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