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감이 닿는 곳에는 진심이 있다
극 중 찰리 케일은 탐정도 형사도 아니다. 다만 거짓말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상대가 말을 함과 동시에-그것이 거짓이라면-찰리는 본능적으로 ‘개소리!(Bullshi*!)’라고 직감한다. 초능력이라면 초능력일 수 있는 그 슈퍼 파워로 인해, 찰리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걸 넘어가지 못하고 그저 지나치면 되는 걸 지나치지 못하는 바람에. 그녀가 가는 곳마다 사건이 잇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녀가 사건을 끝내 놓지 않고 끌어당기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내심의 의도를 파헤치고, 말속에 숨은 저의를 파악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또 있을까. 비단 진위여부를 가려야 하는 범죄 상황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갖가지 사정에는 상대의 말을 독해하기 위한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상대가 하는 말이 과연 진실인지, 상대가 나를 대하는 마음에 뭔가 다른 의도가 있지는 않은지, 속된 말로 저 자가 내 뒤통수를 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 이보다 더 골치 아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찰리의 능력은 대단한 것이 틀림없다. 손절할 대상을 빠르게 파악함으로써 유실되는 에너지를 막고 또 보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나 찰리는 그러한 고효율적인 방식으로 능력을 쓰지 않는다. 도리어 자신과 관계없는, 전혀 득이 될 게 없는 사건들을 파헤치느라 많은 시간과 품을 들인다. 물론 찰리는 탐정도 형사도 아니지만.
<포커페이스>에 등장하는 가해 인물들은 자신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비틀린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원 히트 원더의 퇴물 록 밴드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또 다른 메가 히트곡을 만들어야 한다는 욕망에 휩싸인 루비와 밴드 멤버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주의 깊게 들어줄 생각이 없는 손님들만이 가득한 작은 술집과 공연장을 전전하며 매일 밤 곡을 쓴다. 그러던 어느 날, 투어를 위해 급하게 구한 객원 드러머가 쓴 곡을 들은 루비는 이내 그 곡이 역대급 히트곡이 될 것임을 확신하고, 드러머로부터 그 곡을 탈취할 작전을 짜고 범행하기에 이른다. 불의의 감전 사고로 위장한 드러머의 죽음은 극적인 에피소드로 소셜 미디어에 바이럴 되고, 그 인기에 힘입어 그들은 새 앨범 계약을 앞두게 된다. 루비에게 객원 드러머는 음악적 교감을 나누는 멤버가 아닌 재기를 돕는 수단에 불과하다. 루비의 입장에서 드러머의 제거는 다분히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드러머가 쓴 곡만이 필요했을 뿐, 향후 자신에게 생길 부와 명성을 드러머와 나누고 싶진 않았기에.
다른 인물들의 범행 목적 역시 비슷하다. 영화 <옥자>를 본 이후로 더 이상의 살육은 없다며 갑자기 지역에서 잘 나가던 바비큐 사업을 접으려는 형을 제거하기 위해 범죄를 모의하는 형의 아내와 동생. 수십 년간 일궈온 할리우드 특수효과 전문 제작사의 영예를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남기기 위해 동료와 남편을 독살한 대표, 카레이싱 명문가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라이벌의 자동차를 고의로 망가뜨린 카레이서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의도적으로 상대방의 딸을 함정에 몰아넣는 또 다른 카레이서, 막대한 부를 지닌 아내의 돈을 빼돌리기 위해 오랜 앙숙인 양 위장한 뒤 무대 위에서 싸움을 벌이다 모종의 사고를 계획하는 내연 관계의 배우들까지. 가해자들의 사연은 제각기 다르지만 범행을 일으키는 동기는 같다. 자신의 욕망을 방해하는 요인들은 제거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 요인이 가족과 동료일지라도.
찰리는 이러한 범죄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을 우연히 방문하게 되는 인물이면서, 스스로도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쫓기고 있는 도망자이기도 하다. 신분이 발각될까 봐 찢기고 다쳐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카드 사용도 하지 못한 채 미국 전역을 떠돌고 있는 찰리는 일당이 적더라도 짧게 일하고 현금을 받을 수 있는 일들을 선호한다. 그런 일들은 대체로 법망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함구하게 되는 경우도 잦다. 무술에 능하다거나 자가 재생 치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떠나면 그만일 곳에서 벌어진 사건일 뿐인데도, 찰리는 여성이라는 물리적인 취약함을 무릅쓴다. 가해자의 내심을 증명하기 위해 온 동네를 들쑤시며 단서를 찾고, 증거를 채집하기 위해서라면 몸도 사리지 않는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찰리의 직감이 향하는 곳에는 언제나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피해자가 있다. 피해자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가해자의 표정을 보며 찰리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비단 그가 거짓을 말해서가 아니라 피해자의 죽음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어서. 찰리는 거짓말을 가려내는 능력만큼 불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도 강하다. 어쩌면 찰리의 슈퍼 파워는 그 마음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찰리는 오랜만에 친언니의 집을 찾는다. 찰리를 잡기 위해 경찰들이 언니 집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와중에, 언니는 찰리에게 “너랑 엮이면 엉망이 된다”고 말한다.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았을 테고, 넌 마음씨가 착하니 분명 좋은 일들을 많이 했겠지만, 우리에게 네 초능력은 그저 일상을 망가뜨리고 불필요한 사건을 끌어당기는 트러블메이커에 불과하다고. 정의를 구현하는 초능력자에게 고독함은 필연한 감정일까? 물론 탐정도 형사도 아닌 찰리이지만. 그녀의 로드트립이 당분간 계속되기를 바란다.
OTT 왓챠
원제 Poker Face
크리에이터 리안 존슨
출연 나타샤 리온, 벤자민 브렛, 애드리안 브로디
시놉시스
찰리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누군가가 죽는다. 내 갈 길이나 가고 싶지만 용의자의 모든 거짓말이 눈에 보이는 그녀는 쉽게 지나칠 수 없다. 진범이 밝혀지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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