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하고 온전한 나만의 쇼
티나 페이가 한 시대의 걸출한 작가일 뿐만 아니라, 쇼의 헤드라이너로서도 손색이 없는 코미디언이자 멋진 퍼포머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SNL>도, <퀸카로 살아남는 법>도 아닌(한국어 제목이 긴 편이니 원제인 <Mean Girls>로 칭하겠다.), <30 Rock> 덕분이었다. 장편소설을 한 편 탈고하겠다는 일념으로 학교를 휴학하고 나서 카페 아르바이트와 주 3회 요가를 하며 제법 일정하고도 나른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하루 일과의 체크리스트 중 하나였던 ‘미드 보기’를 위해 업데이트된 신작들을 확인하다가 알게 된 쇼였다. 불법 다운로드 근절 캠페인에 편승하는 문화 시민이고자 했던 그 시절의 나는 음악이나 영화 같은 경우는 제대로 된 요금을 지불하고 보거나 듣곤 했으나 신작 쇼의 경우에는 아니었는데, 실제로 신작 쇼를 제공해주는 정식 서비스도 없었거니와 정말 조금만 기다리면 어디선가 엄청난 구력을 지닌 취미 번역러 분들께서 나타나 한국어 자막을 제공해주었기에 인터넷을 통해 여러 미드를 볼 수 있었다. 기필코 영화는 극장에서, 혹은 티켓값에 준하는 유료 서비스로 보는 나름 떳떳한 향유자인 양 굴었으면서, 어째서 미드를 볼 때엔 주야장천 토렌트나 웹하드 사이트에 들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걸까? 물론 자료를 다운받을 때마다 유료 결제를 하긴 했지만 그게 온전히 생산자의 몫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넷플릭스와 훌루, 애플 TV가 ‘구독’이라는 서비스를 통해 우리 생활에 미친 저작권에 대한 인식 증진은 꽤 대단한 것임엔 틀림없다.
각설하고, 휴학 생활 동안 나는 처음으로 200자 원고지 300매 분량의 중편 소설을 미완성 수준으로 탈고했고(!), 널브러져 있던 시간의 절반은 감자칩을 먹으며 <30 Rock>을 보곤 했다. 그때 이후로 쭉 <30 Rock>은 나의 올타임 페이버릿 쇼가 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고 재정주행하며 보게 되었다. 랜덤으로 아무 에피소드를 틀어놓고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양 그들이 내뱉은 대사를 줄줄 꿰게 되는 나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 셈이다.(내 명예의 전당에 오른 심신 안정용 쇼들 중에는 티나 페이가 시카고에서 즉흥극을 시작할 때부터 막역한 사이였던 스티브 카렐의 <The Office>, 티나 페이와 함께 골든 글로브 사회를 보기도 한 영혼의 단짝인 에이미 폴러의 <Parks And Recreation>, 이 외에도 이 쇼들의 작가나 배우들이 출연한 여타 작품들, <The Office>의 작가이자 배우였던 민디 케일링의 <The Mindy Project>, <30 Rock>의 막내 작가였지만 이제는 차일디쉬 갬비노라는 스테이지 네임으로 더 유명한 도널드 글로버의 <Community>, <Parks And Recreation>의 의뭉스럽고 미스터리한 조수 에이프릴을 분했던 오브리 플라자의 전작들 전부. 이 모든 가지치기가 20분 분량을 넘지 않는 코미디 쇼를 향한 나의 극진한 미드 덕질로부터 시작되었다니!)
극중 ‘트레이시 조던의 TGS’라는 쇼의 수석 작가 리즈 레몬이 회의실 책상에 앉아 다른 작가들이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 같은 엉터리 스케치 아이디어를 들어주고, 쇼에 출연하는 유명 연기자들의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사건 사고를 무마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방송사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적절하게 반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한 채 늦은 저녁, 신선한 재료가 단 한 가지도 들어가지 않은 가공 식품으로 한 끼를 때우다 말고 기절하듯 잠에 곯아떨어지는 모습을 매 에피소드마다 관찰하면서 그간 봐왔던, 작가의 삶을 다소 우아하게 그려낸 영화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영화들이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모던 라이터의 생애를 대변하지는 못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십대 초반이었던 나는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와 기분으로 살고 있는 삼십대 후반의 리즈 레몬에게 완전히 과몰입하면서도, 저 지난한 복잡함과 끝도 없는 정신없음이 도대체 언제까지 지속되는 걸까 싶어 당혹스러웠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삶의 모든 것들이 다 안정적일 순 없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쇼의 수석 작가이고 적어도 렌트비는 감당 가능하며, 어쨌거나 고위직이자 책임자인 잭 도너기와 친구가 될 수는 있잖아? 하고 반문하면서.
티나 페이가 만들어낸 작품 속에는 다소 불운한 것 같은 기운을 내뿜고 있는 삼십대 후반의 여성들을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젊지도 늙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때때로 어리기에 자유로운 이들과 긴 세월을 통과하며 여유로움을 탑재한 이들을 질투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리거나 늙은 자들 사이에서 중재하느라 골치가 아픈 인물들. 공중파 방송국 쇼 프로의 수석 작가인 <30 Rock>의 리즈 레몬에게는 어디에 내놓아도 볼썽사납고 부끄럽기만 한 전 애인이 있다. 관계를 끊어내는 게 옳다는 걸 알면서도 새로운 관계를 맺기에는 생활 전반이 빈틈은커녕 언제나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고, 무엇보다 나의 결점과 약점도 모르는 상대와 모든 걸 하나하나 다시 맞춰가야 한다는 것이 두렵다. 더군다나 파산한 전 애인은 당장 머물 곳도 없다. 집세가 비싼 대도시에 살면서 부랑자가 될 판인 전 애인을 그냥 내쫓을 수는 없으므로, 관계는 이미 끝이 났지만 연민의 심정을 가득 담아 얼마간 룸메이트 사이를 지속하게 된다. 물론 돈은 일절 안 내는 룸메이트지만.
십대 소녀들의 이야기에 국한돼 보이지만 <Mean Girls>에서도 티나 페이가 분했던 수학 선생 역할인 노버리를 보면 지독한 암담함을 느끼게 된다. 방학 동안 잘 지냈느냐는 스몰 토크격인 질문에 노버리는 남편과 이혼을 했고 그 덕분에 모아둔 돈도 잃고 집도 잃었으며 빚이 잔뜩 생겨서 쓰리잡까지 해야만 하는 속사정을 아주 무미건조하게 답한다. 개인사적으로는 무척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큰일이겠지만, 마치 어른들에게 이런 엄청난 일들은 출근길 아침,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아스팔트 위를 잘못 디뎠다가 아끼는 신발을 잃게 될 수준의 불행일 뿐이며, 닥치지 않아서 모르는 고통일 뿐이지 이 정도의 불행쯤은 언제나 도처에 경고 시그널을 감추며 숨어 있다고 일갈하듯이 말이다. 나는 케이디와 레지나 조지의 권력관계에 집중하기보다, 수학경시대회를 나가는 일은 사회적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길 만큼 학내 포지션이 마치 이 세상의 마지막 유일한 계급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하는 십대들에게 늙은 너드로 영원히 포지셔닝된 노버리의 일상이 더 궁금하곤 했다. 아이들은 졸업 파티를 치르고 떠나가면 그만이지만, 선생인 그녀는 학교에 남아 매년 그 고달픈 인기투표에 시달려야 하니까.
<걸스 파이브 에바>의 돈 솔라노 역시 마흔이 코앞인 삼십대 후반의 여성이다. 스파이스 걸스나 데스티니스 차일드와 같은 걸 그룹이 서구 음악계를 점령하던 90년대에 막차로 탑승했으나 아쉽게 원 히트 원더로 그치며 퇴장하고만 ‘Girls5eva’의 멤버였던 돈은 현재 맨하탄이 아닌 퀸즈에 살며 오빠의 식당 매니저로 일을 한다. 말리부 섬에 별장을 두고 전용기를 타는 슈퍼스타를 꿈꾸었지만 지금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카고 역사책 따위를 읽으며 계획에 없는 휴가 같은 건 결코 가지 않는 동반자 스콧과 함께 아이를 양육한다. 돈에게 가장 즐거운 일은 스콧과 소파에 누워 매주 TV 시리즈를 챙겨보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로 가장 핫한 래퍼의 곡에 그룹의 노래가 샘플링되는 것을 알게 된 돈은 어쩌면 다시 무대에 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으며 멤버들을 찾아 나서게 되고, 그들은 새로운 앨범을 제작하며 재기를 노린다. 그러나 돈은 슈퍼스타로서의 삶에 대한 갈망으로 늘 현실과 불화해온 멤버 위키와는 달리, 현재 자신의 삶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일상을 그저 무대 뒤의 씁쓸하고 초라한 모양으로 바라보거나 느끼지 않으려 한다. 돈은 무대에 올라설 때의 희열과 환희에 충분히 반응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아티스트이자 디바 모드에 충실하고자 공연장에 때때로 남편을 부르지 않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착하고 단순하며 밋밋한 삶을 사는 남편의 지독할 정도로 똑같은 하루하루가 자신에게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두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싶어 하는 인물들 역시 티나 페이가 만들어낸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역할들이다. <Mean Girls>의 레지나 무리와 케이디가 그러하고, <30 Rock>의 제나와 <언브레이커블 키미 슈미트>의 타이투스, <걸스 파이브 에바>의 위키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그들 주변에는 늘 안전하고 안정된 일상을 유지하려는 이들도 함께 그려진다. 그리고 짐짓 재미없고 무료하며 눈에 띄지 않는 그들에게도 나름의 주인공 모멘트가 있다는 것을 쇼는 넌지시 보여준다. 돈 솔라노 역시 쿨한 싱어송라이터이자 퍼포머, 든든한 양육자와 상대에게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아내 역할의 균형을 잡는 것이 늘 아슬아슬하기만 하고 자칫 잘못하다간 한쪽으로 쏠릴 것 같아 걱정스럽다. 그럼에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위에서도, 웬만하면 오늘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그 어떤 이벤트도 없길 바라지만 마흔을 앞두고 예정에 없던 아이를 임신해버리고 마는 일상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타인이 점지하거나 평가하지 못하도록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를 소망한다. 삶에서 가장 멋진 순간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헛헛해지지도 않고, 감자칩 부스러기가 잔뜩 묻은 스웨트 셔츠를 입은 채 드라마를 보는 것이 일상의 유일한 낙이라고 해서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지도 않는 그 어딘가, 그곳이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무대일지 모른다. 삶이라는 길고 긴 자신만의 무대 위에서 그 누구의 찬사도 비난도 없이 매 순간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 그 모든 과정이 전부 자신만의 러닝타임으로 흐를 테고, 그곳에서만큼은 그녀는 이미 영원한 슈퍼스타일 것이다.
기이한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멤버 애슐리가 없음에도 그들은 ‘걸스포에버’가 아닌 여전히 ‘Girls5eva’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과거 씬을 회상하거나 버츄얼 기술로 이미지를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 팀 내 유일한 동양인인 애슐리가 등장할 수 없다는 것이 매우 안타까운 부분이긴 하나, 그와는 별개로 대중이 그녀들을 잊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원 히트 원더 그룹이기에 팀명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다가도, 현재의 결여와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는 걸 강조한다는 맥락에서 보자면 이 코미디적인 설정이 또 다른 의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에 내심 감탄하게 되고 만다. 마크 트웨인 상을 최연소로 수상한 여성이자, 미국 내 각양각색의 모순적인 이슈를 언제나 있는 그대로 풍자해온 티나 페이의 쇼를 보며 자라온 나로서는 언젠가 그녀의 쇼에 동양인 여성이 비중 있게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그녀 자신이 말했듯 <SNL>의 여성 제작진 비율이 높아지면서 갖게 된 다양하고 자유로우며 부드러운 수용이 한결 더 확장되는 순간이 찾아오기를. 연례 행사처럼 티나 페이의 전작을 감상하며 지치거나 힘들 때마다 그 시절 <SNL> 스케치 영상을 찾아보며 한바탕 낄낄거리는 한 명의 동양인 시청자이자 후배 작가로서 소망해본다. 그리고 그 소망을 품으면서 나 또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기 꺼렸거나 하지 않기로 한 것들을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작업과 일상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티나 페이로부터 얻은 냉소와 유머를 늘 동시에 담지하며.
OTT 넷플릭스 / 웨이브
원제 Girls5eva
크리에이터 메러디스 스카디노
출연 사라 발레리스, 비지 필립스, 폴라 펠, 르네 엘리스 골즈베리
시놉시스
한 곡의 히트곡을 남기고 해체된 원 히트 원더 5인조 걸 그룹 걸스파이브에바. 20년 만에 다시 한번 팝스타의 꿈을 꾸는 중년 여성들의 코미디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