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신, [동네 한 바퀴], 2008
2008년 11월, 일 년 동안 준비한 교원 임용 시험을 보고 나오던 날의 쌀쌀했던 날씨를 기억한다. 1차 시험은 객관식이었기에 합격자 발표를 기다릴 것도 없이 탈락. 수험생 카페와 구직 사이트를 오가며 방황하던 시절, 윤종신의 새 앨범 [동네 한 바퀴]가 나왔다. 작은 방에 처박혀 겨우내 듣고 또 들었다. 음악이 막막한 현실 자체를 바꿔줄 수는 없었지만, 음악으로 인해 아침의 공기가, 오후의 색깔이, 밤의 온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 허허롭던 2008년의 겨울 냄새가 난다.

열성 팬이었다고까지 하긴 민망하지만 그래도 중학생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윤종신이었다. 그의 데뷔 첫 단독 콘서트를 비롯해 여러 번의 공연을 함께했고, 팬클럽 ‘공존’도 드나들며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이건 정말 민망해서 쓸까 말까 하다 쓰는데, 생일잔치도 몇 번 갔…) 당연히 정규 앨범은 모두 가지고 있고, 도토리로 산 미니홈피 배경음악도 많았다. 남성 팬이 많은 그였지만 온라인에서 까불며(?) 활동하는 팬은 많지 않았는지, 2004년 2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입대를 앞두고 ‘공존’ 게시판에 군대 다녀온다는 글을 남겼을 때 댓글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20대 후반이면 어린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처음엔 힘들지만,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댓글이 큰 힘이 되었다. 처음엔 제법 힘들었지만 조금 지나자 그의 말처럼 정말 괜찮아졌다.

이별보다는 사랑 이야기에 좀 더 목이 말랐던 탓이었을까. [동네 한 바퀴] 앨범에서 널리 알려진 곡은 <내일 할 일>이었지만, 내가 가장 사랑했던 곡은 <같이 가 줄래>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다짐 같은 가사 탓에 결혼을 한다면 꼭 이 노래를 축가로 부르고 싶다는, 지금 생각하면 애처로운(?) 생각을 하며 들었다. 물론 현실의 나는 시험에 일 년 더 올인을 할 것인가, 아르바이트로 학원 강사라도 병행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30대 초반의 무직의 솔로 남성.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살게 해 줄 누군가가 막연히 그리웠던 건지도 모른다.

같이 가 줄래 너만 있어준다면 난 괜찮은 사람으로 살 것 같아
너의 웃음 지켜주다 보면 내 삶도 웃을 거야
그 하나로 난 족하지 내 눈 감는 그 순간 너의 얼굴 하나 있다면

시간이 흘러 아예 학원 강사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러다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살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 2012년 2월 어느 날로 날을 잡게 되었다. 식장을 정하고, 주례 선생님을 모시고, 신혼여행을 준비하고… 그리고 축가. 당연히 <같이 가 줄래>를 부르기로 마음먹고 연습을 시작했다. 노래 한 곡을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이 듣고 불러본 것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애초의 계획은 신부 몰래 하는 것이었으나 어처구니없게도 결혼식 보름 전에 성대결절(!)이 오는 바람에, 축가로 <She’s gone>을 준비하는 것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김이 빠진 축가 이벤트는 수차례의 음 이탈과 함께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유튜브 어디에 아직 저화질 영상이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래 잘하는 사람은 정말 많잖아요. 저는 노래 잘하는 사람도 좋지만, 좋은 노래 부르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1994년 대학로의 작은 소극장에서 윤종신이 했던 말이다. 그 약속을 이렇게 오래 지켜줘서 고맙다고, 덕분에 군대도 잘 다녀왔고, 축가도 잘 불렀고(?), 남편으로 아빠로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 비슷하게 살고 있다고 꼭 전하고 싶다. 중년의 아저씨가 뜻밖의 원고 청탁을 받고 뛰는 가슴으로 글을 쓰는 겨울밤, 십여 년 만에 <같이 가 줄래> 한 곡을 반복해서 들으며 쓴 글이 영 팬레터 같아서 민망하지만 어쩔 수 없다. 10년이 더 지나 이 노래에서 2023년 지금의 설레는 겨울 냄새가 나더라도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