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인생을 살아봐>(2022)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가끔씩 희한한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살면서 해왔던 여러 선택과 결정의 옵션들을 다시 늘여놓고는 기회비용을 정산해보는 것이다. 그때 이것을 택했더라면, 이곳 말고 그곳을 택했더라면, 그것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더라면. 문제는 이 정산을 하게 되는 타이밍인데, 어떤 결정을 앞두고 선행했어야 할 각성과 번뇌의 시간을, 이미 일이 다 벌어진 이후에야 뒤늦게 따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계산은 회한의 감정만을 극도로 고양시킬 뿐, 현재의 내게 별다른 이점이 없다. 그저 내가 미련 범벅인 사람이라는 확신만 더 짙어질 뿐이다.

그럼에도 때마다 내가 해왔던 결정들의 기준은 딱 하나였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미래의 내가 이토록 후회할 줄은 모르고, 그때의 나는 매번 당장 후회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새벽 세 시에는 라면을 먹으면 그다음 날 후회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은 먹고 보는 건 왜일까? 멀리하지 않으면 분명 인생의 한 시절을 낭비할 것이 빤한 남자를 기어이 만나려는 건 또 뭐였고. 하지 않기로 했으면서 하게 되는 것, 해야만 하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안 해버리는 것. 내가 정해진 일정이나 플랜으로 채워진 경로를 좀처럼 제 속력으로 가지 못했던 건 자주 삐끗하거나 이탈하게 되는 선택의 순간들이 자주 찾아왔기 때문이다.

영화 <두 인생을 살아봐>의 주인공 나탈리는 고향 텍사스를 떠나 친구 카라와 함께 LA에 갈 예정이었다. 전공을 살려 애니메이터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졸업을 앞둔 어느 밤, 나탈리는 호감은 있으나 애정이 있다고 말하기는 애매한 게이브와 자축의 개념으로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얼마 뒤, 졸업 파티에서 술을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속을 게워내던 나탈리를 위해서 카라는 각기 다른 업체의 임신 테스트기 두 개를 가져온다. 혹시라도 결과가 잘못 나올지도 모르니 안심하기 위해서. 그렇게 나탈리는 파티 호스트의 집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임신 테스트를 한다. 한 줄일지, 두 줄일지 기다려야 하는 막막한 순간. 그때부터 화면은 이등분으로 분할되기 시작하고, 이후 장면들은 그녀의 삶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빨갛고 선명한 선. 그 선의 개수에 따라 미래는 내가 정해놓은 경로를 따라 펼쳐지거나, 아예 새로운 플랜B를 필요로 한다. 나탈리에게는 임신을 하지 않는 경우의 수, 그리고 임신을 하게 되는 경우의 수가 있다. 영화는 이 두 가지 경우가 그녀에게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을 그리고 있다. 아이를 갖게 된 나탈리는 LA가 아닌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간다. 딸이 대학에 가고 독립을 한 이후, 매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연인 상태로 ‘벌거벗은 일요일’이라는 그들만의 자유로운 리추얼을 즐기던 나탈리의 부모 역시 딸의 급작스러운 계획 변경에 가담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사랑스러운 손녀를 얻게 된 것과 별개로, 20년간의 양육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롭게 정립한 그들만의 일상과 규칙이 무참히 사라지는 건 그것대로 심란한 일이다.

<두 인생을 살아봐>(2022)

영화는 계획에도 없던 임신을 하고 난데없이 엄마로서 살아가야 하는 나탈리의 심정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꿈을 좇기 위해 먼저 LA로 떠난 카라와 통화를 하는 도중에도 난데없이 눈물이 흐르고, 무슨 일이 있냐는 카라의 물음에 아무 일도 없고 그저 호르몬 탓이라고, 사실은 그게 가장 이상한 일이라고 답하고 만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처 비어져 나오는 눈물처럼, 이른바 ‘임출육’의 기간을 통과하는 동안 나탈리의 의지와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값이란 건 애당초 기대할 수 없다. 나탈리 개인의 타임라인은 온전히 아이로부터, 그리고 아이에게로 맞춰질 수밖에 없으니까. 아주 잠깐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는 밤이면 나탈리는 쓸모없는 기회비용을 정산해보게 된다. 만일 내가 임신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게이브와 하룻밤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지금쯤 존경해마지 않던 감독이 이끄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밤낮없이 일에 매진하고 있지 않을까. 열심히 쌓아놓은 포트폴리오를 보고 누군가 자신의 성과를 인정해주고, 그로 인해 멋진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까. 더없이 부질없고 의미 없는 회한만이 그녀를 뒤늦게 자꾸만 괴롭힌다.

원래의 계획대로 차근차근 LA에서의 생활하게 된 나탈리 역시 마찬가지다. 같이 살기로 한 애인이 반 년간 해외 출장을 나가게 되는 변수가 생기고, 그 타이밍에 맞춰 나탈리는 권고사직을 당하게 된다. 꿈을 이루기 위해 LA에 왔다고 해서 원하던 대로 좋은 일들만이 발생하거나 촉진되거나 업그레이드되지 않는다. 왜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오는 건가 싶지만, 예측한 대로 삶이 흘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삶에 발생하는 모든 상황은 우연을 가장해 찾아오고, 그걸 빌미로 뒤이어 다른 사건을 낳으니까. 나탈리가 임신하게 된 것처럼, 평행세계의 나탈리에게도 기회비용을 정산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기회비용이라는 것은 그 순간만큼은 이제는 다시 없을 가능성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우연과 가능성에 대해 따뜻한 결말로 답한다.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그 나름의 슬픔과 좌절이, 그리고 그 나름의 만족과 기쁨이 수반되리라는 것을. 내 삶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좀처럼 들어먹지 않는 시기를 겪기도 하고,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굴레로부터 단박에 해방되는 힘을 갖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 모든 건 결국 타이밍의 문제일 뿐이고, 언제가 되었든 한 번쯤은 내게 꼭 알맞은 타이밍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라는 희망. 영화는 아직 오지 않은 그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물론 흠, 너무 보드라운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나탈리에게 임신을 하지 않기로 한 경우의 수가 없다는 것도 조금은 의아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나탈리가 택한 모든 결정이 그 나름으로 완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전하다. 모든 가능성에 대한 존중. 아마도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지 않을까. 가끔은 이처럼 따뜻하고 보드라운 낙관의 메시지가 필요할 때가 있다. 어느 잠들지 못하는 밤, 뒤늦은 기회비용 정산의 시간을 갖고 난 이후라면 더더욱.

<두 인생을 살아봐>(2022)
OTT NETFLIX
원제 Look Both Ways
감독 와누리 카히우
출연 릴리 라인하트, 대니 라미레스, 데이빗 코렌스웻, 아이샤 디
시놉시스
대학 졸업식 , 내털리의 삶은 임신 테스트 후에 가지 평행 현실로 나뉜다. 삶과 사랑은 과연 무엇을 안겨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