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래소>(2021)

표류하기, 변명하기, 중도 하차하기

볼 게 없다는 말은 거짓말일지언정 볼 게 너무 많아서 볼 게 없다는 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시점에는 콘텐츠라는 단어도 당구공처럼 딱딱한 무언가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콘텐츠라는 단어는 ― 마틴 스콜세지의 말을 굳이 빌려오지 않더라도 ― 탁구공보다도 훨씬 더 가벼운 존재처럼 느껴진다. 유연한 몸놀림으로 집중해서 바라보지 않으면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고,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 도통 모를 예민한 것. 수만 수억 개의 탁구공이 매분 매초 하늘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바람에 구석으로도 피할 수 없어서 스멀스멀한 공포를 느끼는 사람, 그렇게 익숙한 과거의 것과 사양산업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그냥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 나 말고도 여럿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사회로 한 발짝 두 발짝 나아가려면 인싸 콘텐츠 시청에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싸-되기를 간절히 바라거나 동경하는 게 아니더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매번 난처하다거나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 속으로나 유행하는 거 안 보는 건 내 자유고! 신념이고! 외칠 수 있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앗 제가 게을러서 아직… 이라거나 저… 사실 못 봤는데요, 앞으로도 안 볼 것 같지만 암튼 뭐 제 뚝심입니다, 같은 재수 없는 말을 지껄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신 제가 빠진 건 요런 것이고, 요즘은 이런 걸 보고 있는뎁쇼… 라고 혼자서만 신나게 떠들 수도 없다. 현실을 살아 제발…

그렇게 3월, 현실 살기를 목표로 한 콘텐츠 망망대해에서의 표류를 시작했다. 클릭한 편수로만 따지면 지지 않을 자신도 있다. 다만 주행할 수 없는 조건이 자꾸 늘어난다는 게 문제다. 으악 징그러워 왜 저렇게 죽이고 죽어야 해! 부터 남의 사랑 얘기에 설레거나 눈물 흘리기에는 지금 내 마음이 너무 쪼잔하네, (이미 올림픽으로 살아있는 드라마를 맛본 마당에) 저건 좀 가짜 같네, 왜 지지고 볶고 난리 치면서 같이 살려고 하냐고 그냥 제발 좀 따로 살아, 희대의 스타트업 사기꾼 얘기에 돈을 얼마나 들인 거야 캐스팅 낭비 무슨 일이야 까지… 온갖 핑계와 짜증과 업신여김과 중도하차로 인해 현재 내 알고리즘은 제정신 아닌 유령의 기운으로 가득 찬 상태. 그 사이에 애플 TV+ 시리즈 <테드 래소>를 만났다.

라커룸에 뛰어든 친절한 남자

주인공 테드 래소의 첫 등장은 2013년의 한 영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축구 용어는 물론이고 규칙조차 모르는 미국 대학 미식축구 감독이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EPL) 팀의 감독으로 부임해 겪는 문화 충돌을 담은 4분 41초짜리 모큐멘터리. <테드 래소>는 당시 NBC 스포츠가 EPL 미국 중계권 인수를 기념해 만든 광고 영상을 오리지널 시리즈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이 과정에서 형식은 드라마로, 테드 래소의 캐릭터 설정은 더없이 낙천적이고 유쾌하며 상냥한 인물로 바뀌었다.

비행기에서 잭 캐루악 책을 읽으며 영국으로 날아 온, 그야말로 미국적인 ‘런던의 아메리카인’에게 기대를 거는 영국인은 거의 없다. 연패를 거듭 중인 데다 리그 강등 위기에 처해 있는 팀 AFC 리치먼드를 절대로, 제대로 이끌 수 없을 거라는 확신과 야유만 넘쳐날 뿐이다. 게다가 감독 선임의 배경에는 전 구단주였던 바람난 남편을 향한 복수를 위해 남편이 가장 사랑했던 팀을 망가뜨리려는 새 구단주 레베카의 음모가 있다. 이에 더해 스타 플레이어이지만 이기적이고 오만한 선수 제이미와 주장 로이를 비롯한 선수들의 갈등, 인종차별 등등 여러 문제로 원팀이라는 골은 요원하기만 하다.

<테드 래소>는 난관의 연속을 맞이한 축구 구단을 무대로 테드 래소가 팀을 재건하는 과정을 담은 코미디 시리즈이다. 가깝게는 2019년 방영한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 등 수많은 스포츠 장르에서 거듭 보아 온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처음 공개된 2021년, 이 시리즈가  20개의 에미상 후보에 오를 만큼 호평을 받은 이유는 이야기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는 강인한 남성성으로 팀 구성원을 압도하는 리더십이 아닌, 경기 전후의 라커룸을 돌보는 명랑한 리더십을 조명한다. 매일 아침 직접 구운 비스킷을 선물하고, 각자가 소중하게 간직해온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하고, 결코 의심하지도 화내지도 않는 남자 테드 래소. 래소 덕분에 팀원들은 결핍과 냉소주의를 떠나보내고, 우정과 사랑으로 서로를 포용한다. 이 모든 게 실은 판타지인 것을 알면서도, 땀 흘리고 소리 지르며 맹렬하게 달려드는 스포츠 드라마의 희열은 부족할지라도, 시즌을 거듭할수록 얼렁뚱땅 허술한 우여곡절이 이어질지라도, 이 드라마를 볼 때만큼은 행복이 나를 감싸 안은 달콤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했던 따뜻한 영화에서 만날 수 있었던 당연하고 소중한, 그러나 2020년 이후의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을 잠시나마 되찾게 되는 것이다.

3월 25일, 올해의 기대작 <파친코>가 애플 TV+에 드디어 공개된다. 누군가는 새로운 시리즈를 기다리며, 누군가는 탐험하는 마음으로, 또 누군가는 남은 구독 기간을 알뜰살뜰히 사용하려는 부지런함으로 <테드 래소>를 만나보시기를. 팀 리치먼드의 라커룸에 붙어 있는, 래소가 직접 써 붙인 표어 “Believe”처럼, 믿음이라는 다정하고 간결한 전략이 마음을 살며시 움직일 테니.

 <테드 래소>(2021)
OTT 애플TV+
원제 TED LASSO
출연 제이슨 서디키스, 한다 웨딩햄, 주노 템플
시놉시스
미국 미식축구 코치 테드 래소. 축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영국 축구팀 코치로 발탁되며 런던으로 떠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데… 그는 긍정적인 에너지와 투지, 그리고 비스킷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보려 한다. 골든 글로브 수상에 빛나는 제이슨 서디키스 주연의 코미디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