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않는 인간들의 밤>(2020)

죽이는 여자들

소희의 남편 만길은 도무지 지칠 줄을 모른다. 미스터리 연구소 소장 닥터 장의 조사에 따르면 ‘무려 21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서울 각지를 종횡무진 누비며’ 체력단련과 음주 가무, 불륜을 이어간다. 도무지 인간의 체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이 남자의 정체는 바로 지구를 침공하기 위해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퍼뜨리러 온 외계인, ‘언브레이커블’이다.

소희와 고등학교 동창인 세라, 양선은 의기투합해 수상하다 못해 괘씸하기 짝이 없는 남자를 해치우기 위한 소동을 벌인다. 주식으로 휘발유를 마시는 요사스러운 외계인 무리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양이 항문낭에서 채취해 특수 제조한 용액을 주사하는 것뿐. 아무리 때리고, 땅에 묻고, 절벽으로 떨어뜨려도 이 남자와 언브레이커블 무리는 죽을 줄을 모르고, 얼렁뚱땅 펼쳐지는 살인극 사이에 생뚱맞게 끼어드는 빌리 아일리시의 ‘bad guy’를 배경 음악 삼아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처럼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자꾸만 튀어나온다. 과연 세 친구는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남자들을 응징할 수 있을까?

이 영화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을 이끄는 것은 주연을 맡은 세 여자의 표정과 몸짓이다. 가냘픈 몸과 쨍한 목소리로 돌연 샤머니즘적 광기를 내뿜는 배우 이정현, 폭력으로 일그러진 한국형 스릴러의 세계를 절박하게 통과하며 서슬 퍼런 눈빛을 번뜩이는 배우 서영희, 단단하고 날렵한 몸으로 매번 유쾌한 재주넘기를 선보이는 배우 이미도가 무대를 코미디로 옮겨 남자를 죽이고 싶어하는, 죽이는 여자들을 연기한다.

모양새가 대체로 우습기 짝이 없는, 발산하는 에너지의 세기와 방향이 일정치 않아 때로 맥이 풀리고 마는 황당하고 이상한 활극 속에서 이들 셋은 우정이라는 이름의 결기를 모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한다. 밀어닥치는 못난 남자들을 상대로 밤을 꼴딱 새우며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들이받으며 아침을 되찾으려는 무모함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쉴 새 없이 키득거리다가도 순간 오싹한 감정이 솟구치는 기기묘묘한 코미디에서 살기와 생기가 함께 느껴진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의 내일

가끔이지만, 불현듯 살고 싶다는 생각이 몸을 쏜살같이 관통할 때가 있다. 내 경우 대게는 무언가가 너무 좋아져 버려서 그다음이 몹시 궁금해졌을 때가 그렇다. 좋아하는 사람들의 주름을 오래 헤아리고 싶은 마음, 다음에도 이어질 수다를 기대하는 마음, 연재 중단된 만화의 결말을 기다리는 마음이라든가 작가의 새 작품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삶을 계속해서 이어가게 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다음을 기다리는 일은 혼자서는 기약할 수 없는 일방적인 기대이기도 해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툭 끊기기도 한다.

연말 연초를 지나오며 다음을 기대했던 이들의 부고를 유난히 많이 들었다. 작가 조앤 디디온, 영화감독 장 마크 발레, 배우 가스파르 울리엘, 그리고 신정원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그만의 유별나고 독특한 감각을 담은 코미디 영화 <시실리 2km>, <차우>, <점쟁이들> 등을 거쳐 2020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은 그대로 유작이 되었다. 이들의 다음을 볼 수 없다는 쓸쓸한 마음에 새로운 것보다 지난 것을 붙잡고 늘어진 새해를 보냈다.

그러다 문득 너무 당연한 생각에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들의 내일은 없을지언정, 이들이 남긴 것과 함께하는 내일은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 때로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때로는 노련한 표정으로 아주 천천히 그리고 긴 호흡으로 추억하면 된다는 것. 씩씩하고 우렁차게 새해 소원을 빌어 본다. 여기 남은 모든 사랑하는 이에게 다음이 있기를, 다음의 다음의 다음까지 있기를.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2020)
OTT Netflix, wavve, WATCHA
감독 신정원
각본 장항준, 신정원
출연 이정현, 김성오, 서영희, 양동근, 이미도
시놉시스
신혼의 단꿈에 빠져있던 ‘소희’(이정현)는 하루 21시간 쉬지 않고 활동하는,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남편 ‘만길’(김성오)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등학교 동창인 ‘세라’(서영희)와 뜻밖에 합류하게 된 ‘양선’(이미도) 그리고 미스터리 연구소 소장 ‘닥터 장’(양동근)과 힘을 합쳐 반격에 나선다. 만길의 정체가 지구를 차지하러 온 외계인 언브레이커블임이 밝혀지고, 정부 요원까지 합세하면서 대결은 점점 전대미문의 상황으로 커져만 가는데… 밤은 짧아 최선을 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