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 [Romantopia], 2005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골목은 비포장이어서 걸핏하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나 팔꿈치가 까지기 일쑤였다. 그곳은 구슬치기, 공기놀이, 땅따먹기, 소꿉놀이를 할 수 있는 놀이터였지만 농부가 소달구지나 돼지를 몰고 오갔으며, 이따금 갓을 쓴 노인이 곰방대를 물고 어기적어기적 지나가기도 했다. 고양이는 처마 아래에서 골목을 내려다보며 하품을 했고, 개들은 아무 집이나 들락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집 앞 개울에서 미꾸라지를 잡거나 종이배를 띄우며 놀기도 했다. 비가 그친 어느 날 불어난 개울에 빠져 하마터면 세상 구경을 마칠 뻔한 적도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친구들은 언제 적 이야기냐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가 나고 자란 동네가 지리산 기슭에 자리한 작은 동네인 탓도 있겠지만, 정말 그랬다.

해 질 무렵이면 돌담을 따라 늘어선 키 작은 집 굴뚝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밥 짓는 냄새가 동네를 가득 메울 때쯤 함께 놀던 아이들의 긴 그림자는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러면 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골목은 다른 세계였다. 박쥐 떼가 날아다니고 개들이 늑대처럼 울어댔다. 이웃집에선 부부싸움 하는 소리가 들렸고, 내 작은 동생은 괘종시계가 종을 칠 때마다 울음을 터뜨렸다. 한번은 한밤중에 마당에 나가 볼일을 보다가 초록색 눈을 가진 도깨비를 본 적도 있었는데 다음 날 빨랫줄엔 어김없이 지도가 그려진 이불이 널려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나보다 일이십 년 더 산 사람들마저도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내가 자고 자란 동네가 워낙 한갓진 탓도 있겠지만, 정말 그랬다.

어느 장날엔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서커스를 구경했다. 할머니는 카스텔라를 밤알처럼 만들어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어느 날 오후엔 할아버지 등에 업혀 징검다리를 건너 밭에 갔다. 할아버지는 나무를 깎아 팽이나 장난감을 만들어 주었다. 깊은 밤이면 할머니는 까칠까칠한 손으로 콩닥거리는 내 가슴을 토닥거렸고,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꿈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면 나 홀로 낯선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쳐 불러도 아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런 얘기를 하면 어느덧 내 주위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꿈을 꾼 건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그랬다.

당신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세계, 그 암담한 세계가 바로 오늘이 될 거란 사실을 당신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살아오며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살아오며 한 번도 길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온종일 낯선 거리를 헤매다가 온 오늘, 내 작은 책상 위에는 ‘지도에 없는 마을’에서 날아온 초대장이 놓여 있다. 나는 기꺼이 초대장을 펼친다. 그러자 어디선가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지나간 어느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 그 어딘가에서 당신이 노래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이런 얘기를 하면 지금 내 곁에 있는 당신이 뭐라고 할까. 어쩌면 세상에 그런 마을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정말이다.
당신의 마음속 어딘가에 분명 작고 아름다운 그런 마을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