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들
역시 기술이 있어야 해!?
한명전자 인사팀장 당자영은 ‘칼잡이’로 통한다. 진하 디스플레이 사업부 정리해고를 ‘깔끔’하게 마친 뒤, 임원 승진을 약속받았다. 단, 임원 승진을 위해서는 통과해야 할 커다란 미션이 있다. 창인 생활가전사업부 매각을 위해 구조조정으로 부서별 최소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300명을 정리하는 것, 이 퀘스트를 깨기만 한다면 또 한 번 살아남을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당자영은 또다시 칼을 벼린다.
하지만 ‘목표 달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뜬금없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불쑥 끼어든다. 사내 정치 싸움에 밀려 인사팀 부장으로 발령 난 개발자 최반석에게는 보고서 쓰기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고, 쪼잔한 전 남편 한세권이 벌여놓은 사건도 뒷수습해야 하며, ‘자연스러운’ 해고를 위해 꺼내든 ‘직무역량평가’ 도입으로 회사 임직원이 보내는 따가운 눈초리와 원망, 수군거림도 감내해야 한다.
이쯤 되면 그 누구보다도 한명전자를 때려치우고 싶을만도 한데, 당자영은 임무 완수를 위해 기민하게 전략을 세우고, 자발적으로 통찰력 있는 리포트를 완성하고, 억지스러운 호통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어떻게든 끝까지 버텨 살아남으려고 한다. 도대체 왜?
“지금 여기서 제일 X된 사람이 누군지 알아? 너네 같은 개발자들은 기술이나 있지, 나 같은 인사쟁이는, 그것도 40대 여자는 재취업도 안 되거든!”
사무직 노동에 처음 뛰어든(어떤 시절의 노동들은 4대 보험 가입 이력이 없어 경력으로 쳐주지도 않지만) 2012년 즈음부터 ‘문송한’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역시 기술이 있어야 해!”일 것이다. 결과물이 온전히 내 것도 아니고 전문적 하드 스킬을 요구하는 일도 아니어서 도대체 크레딧에 나를 무어라 표기해야 할지 모를 시간을 보낸 후 ‘기획자’라는 직함을 택하기는 했지만, “회사에서 무슨 일 해?”라는 질문에 “예… 뭐… 이것저것 합니다”라는 대답 말고는 도통 노동자로서의 나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기획자는 내게 낯 뜨거운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인사’ 같은 명확한 직무로 나를 설명할 수조차 없는 나는, 임원이 되고 싶다는 꿈이 없는 나는, 출세욕과 명예욕이 없는 나는, 사내 파워게임에 절대 말려들고 싶지 않은 나는, 퍼스널 브랜딩이 귀찮은 나는, 보여 주기와 티 내기를 어려워하는 나는, 여성이자 장녀인 나는, 이미 ‘당자영의 곱절로 X됐다’는 생각으로 <미치지 않고서야>의 한 회 한 회를 넘기며, “역시 기술이 있어야 해!”를 또 외쳤다. ‘이것저것 다 하는 문과 출신 사무직 노동자’를 부르는 독일어 단어가 있다면,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투덜거림과 함께…
미치지 않고서야
얼마 전, 이 드라마를 보면서 친구에게 “나 회사 다니고 싶어”라는 말을 불현듯 꺼내고서는 ‘와,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따위 소리를!’이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업계 용어와 쿠션어를 두루 익히며 비밀과 가십으로 가득한 인사이드 조크의 세계에 빠져들어 사캐즘으로 가득한 시트콤스러운 매일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회사라는 세계에 진짜로 진입하는 순간, 회사란 곳이 치졸하기 짝이 없다고 매일을 툴툴댈 것이 분명하다. 바틀비적으로 “안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고 선언할 수 없어 꾸역꾸역 일을 해내다 체하는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썩 괜찮은 노동자-되기를 꿈꾸고 있다.
만약 노동의 세계를 롤플레잉 게임으로 구성한다면, 종종 마주치게 될 NPC는 당신에게 질문할 것이다. “왜 일하고 있나요?” 혹은 “무엇을 위해 일하나요?”같은. NPC의 말이라면 당연히 그냥 지나쳐도 되지만, 이 질문은 간혹 당신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연의 세계에 빠뜨릴 것이다. 나는 내 생활을 책임지기 위해 일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속 인물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당자영에게는 치매 노인인 아버지의 요양원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K-장녀의 숙명과 동시에 임원이 되어 유리천장을 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현실이 있고, 최반석을 비롯한 40대 중후반 이상의 남성 가장에게는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한명전자를 떠나더라도 일을 그만둘 수 없어, <미치지 않고서야>의 인물들 대부분이 개인의 이직에 보탬이 되는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기 위해 성과에 매달린다. 일의 재미,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한 애정, 성취욕, 듬성듬성 발견하는 애사심 등등을 만나 이를 일의 이유로 꼽을 수도 있겠지만, 이처럼 ’내가 번 돈으로 어떤 대상을 책임을 진다’는 문장은 자본주의적 노동을 지탱하는 가장 굵은 뼈대로 작용한다.
’일’에 관한 콘텐츠가 점점 많아지고, ‘일잘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일 잘하는 법’이 도처에 널려있으며, ‘미라클 모닝’을 비롯한 자기 계발 담론이 유행하는 요즘, 올해 봄 나는 모종의 이유로 휴식기에 접어들었는데 언젠가는 이를 ‘갭이어’ 같은 단어로 치장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런 식으로 나는 속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서도 어쩔 도리 없이 속아 넘어가고 있는데, 페이스북이 선보인 메타버스 회의실 ‘호라이즌’을 보면서 ‘미친 거 아냐?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돼?’ 빈정대다가도, ‘나도 나중에 저거 해야 살아남겠지’ 같은 불안과 초조함이 스며드는 형태로.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 『커밍 업 쇼트』에서는 ‘무드 경제(mood economy)’라는 개념을 통해, 오늘날 청년들의 목표가 ‘자아의 성장’과 ‘감정 관리’로 축소되었음을 진단한다. 건강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자신의 개인적 과거에서 발견하고 나를 통제하며,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 녹아들어 나를 계발하는 것으로 성장을 지속한다.
이쯤에서 다시 복잡다단한 사무직 노동의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자. ‘300명 정리해고’라는 KPI(Key Performance Indicator)를 향해 달려가는 당자영을, 정말로 ‘핵심 인재’라고 불러도 괜찮은가? 그러나 해고를 ‘언도하는 자’와 ‘집행하는 자’는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면 임원으로 승진하지 않은 40대 이상의 여성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
여성, 몸, 쾌감, 그리고 기술
아침드라마, 일일드라마, 주말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은 여러 우여곡절을 통과해 대부분 창업을 한다. 창업하는 회사도 각양각색이다. 치킨집을 차리기도 하고, 밀키트를 만들기도 하며, 패션 회사를 세우기도 하는 등 가정주부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이 모두는 멋들어진 본부장 혹은 실장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하기 위한 소재일 뿐이다.
오피스 드라마 또는 창업이 소재인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주로 어리숙하거나 의뭉스러운 캐릭터로 그려지거나, 그 수가 현저히 적었는데, 단적으로 tvN 드라마 <스타트업>에서 서달미는 ‘삼산텍’의 CEO지만, 개발자 남성들과 VC 한지평의 조언이 성장 동력으로 더 비중 있게 다뤄진다. HBO 시트콤 <실리콘 밸리>의 주요 무대 ‘피리 부는 사나이’의 우글우글한 테키들 사이에 스쳐 가는 캐릭터가 아닌 주요 캐릭터를 맡은 여성은 단 2명이다.
폴란드 오리지널 넷플릭스 드라마 <섹시파이>는 그간의 경향과 맥을 달리한다. 이 드라마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여성을 위한” 앱을 만드는 여자 대학생 세 명의 이야기이다. 바르샤바 공과 대학교에 다니는 셋—감정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무엇보다 불감증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개발자 ‘나탈리아’,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 성적으로 자신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남자친구와 결혼할 위기에 처한 ‘파울리나’, 테크 회사의 경영자인 아버지에 대한 반항을 ‘아무하고나 자기’ 같은 일탈로 표출하는 ‘모니카’—이 여성의 성애에 관한 편견에 맞서 주체적으로 성장해 각자의 ‘주이상스’를 탐험하고, 모든 여성의 ‘주이상스’를 향한 오르가즘 진단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마케팅하며, 창업하기까지의 쿨하고 짜릿한 과정을 담아냈다.
창업의 기본이 되는 조언을 두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고객이 느끼는 ‘페인 포인트’를 발견하라’, ‘사회를 혁신할 기술을 개발하라’ 수많은 테크 회사가 이 조언을 따라 창업했고,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앞선 두 문장을 통해 주장한다. 그런데 최근, 테크 기업이 내놓은 서비스의 소비자인 나의 ‘가치관 혹은 신념’과 ‘기술로 구현한 편의’가 맞붙을 때마다, 질문을 품게 된다. 기술 혁신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 모두를 위한 기술은 존재하는가?
<섹시파이>는 위의 질문에 ‘이러한 모양새라면, 할 수 있다’고 답하는 작품이다. 수면 앱을 만들던 나탈리아는 교수에게 “섹시하지 않다”는 평을 들은 후, 새로운 앱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청년을 위한 성교육은 부재하며, 아직도 제자리걸음이고,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섹스할 공간은 더없이 부족하며, 여성의 오르가즘은 여전히 금기시되는 소재라는 것. 여성이 여성의 입으로 쾌감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보수적인 시선이 따르며 해를 가하려는 시도도 계속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섹시파이’ 앱이 존재할 수 있다는 당위가 생긴다. 사랑을 나누는 모두가, 특히 여성이 자신의 몸을 해방하고 쾌감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게 해주는 기술 말이다.
이로써 이 이야기는 결국 기술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들이라는 당연한 진실에 가닿는다. ‘섹시파이’ 앱은 “뭐든 될 수 있다는 감정”을, “내게도 몸이 있다는 깨달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하여, 기술은 단순히 숫자나 개발 언어로 이뤄진 과학적 수단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세계를 넓히는 재능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재능이 곧 퍼포먼스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앱을 잘 개발하는 것도 재능이지만, 작업물을 잘 설명해낸다든가 클리이언트가 원하는 것을 소통해낸다든가 사람들이 말하는 대단한 재능은 없어도 인간관계 풀을 잘 맺는다든가”라는 이반지하 작가의 말은 참된 명언이다.
OTT wavve, 드라마(MBC)
연출 최정인
극본 정도윤
출연 정재영, 문소리, 이상엽, 김가은, 안내상, 박원상, 박성근 등
시놉시스
격변하는 직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n년 차 직장인들의 치열한 생존기를 그린 드라마
OTT Netflix
원제 Sexify
출연 알렉산드라 스크라바, 마리아 소보친수카, 산드라 자말스키, 피오트르 파체크, 카밀 보트카 등
시놉시스
교수에게 선택받은 앱만을 대회에 출품할 수 있다. 나탈리아는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교수는 앱이 섹시하지 않다며 퇴짜를 놓는다. 그렇다면 섹시하게 만드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