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셰프들 : 라틴 아메리카>(2020)

길 위에 뿌리를 내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길 위의 셰프들>은 지역의 스트리트 푸드를 조명하는 미식 다큐멘터리이지만 음식 자체보다도 각 지역의 문화사와 길 위에서 진득하게 버텨 자신만의 단단한 세계를 꾸린 사람들의 삶에 더 주목하는 다큐멘터리이다. ‘라틴 아메리카’ 편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브라질 살바도르, 멕시코 오악사카, 페루 리마, 콜롬비아 보고타, 볼리비아 라파스까지 남미의 6개 도시를 중심으로 6개의 에피소드로 꾸려져 있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이들 대부분은 이민자이거나 원주민이며, 여성이자, 몇몇은 장애를 가졌으며, 가난 때문에 거리로 내몰린 소수자이다. 하지만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스스로 거리를 선택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미식이라는 거대한 테마의 틈새에는 거리에서 장사하는 강인한 사람들이 만든 식문화가 굳건히 존재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 누구보다 부지런한 몸짓으로 시장 속에서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사람들을, 북적이는 거리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공동체의 가치관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을 찬찬히 비춘다.

<길 위의 셰프들 : 라틴 아메리카>에 등장하는 이들은 식민지, 전쟁, 민주화 운동, 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남미의 질곡의 근현대사 속에서, 무능하고 폭력적인 가부장제의 굴레 속에서, 깊게 뿌리내린 인종차별 속에서 끝내 견디며 하루하루가 투쟁인 삶을 살아왔다. 요리는 언제나 그 중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는데, 요리가 이들을 구원한 것이자 이들이 요리를 구원한 것이다. 할머니나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지역의 전통이 담긴 요리를 통해 모든 지난한 과정을 겪고 마침내 성공한 이들은 여전히 길 위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웃고 떠들게 만든다.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던 거리의 사람들을 돕고, 새로운 세상을 꿈꿀 동력을 얻기도 한다.

지금,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안녕할까. 거리의 활력이 사라진 시대, 우리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지 추억하는 일조차 너무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전 세계 모두가 하나님, 부처님, 그 밖의 모든 신들의 이름을 부여잡고 “부디”, “제발” 같은 부사를 읊조릴 수밖에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나는 본질적으로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한때의 나는 이방인인 내가 여행자 혹은 관광객이라는 신분으로 이국의 땅을 밟을 때, 나는 테마파크와 접속하는 것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특히나 제3세계의 로컬 체험은 돈으로 이국의 타자가 되어보는 환상을 사는 행위라고 확신해왔기 때문에, 그런 공간에서는 거의 언제나 심드렁한 기분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여행이 영영 멈출까 봐 두려운 날들 사이에서 지금의 나는, 내가 겪은 로컬의 무엇무엇과 그것들을 바라보던 내 태도야말로 지극히 계급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이라는 것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반성하기도 한다. 그런 내가 지금 이곳에서 마음 편히 안녕을 기원해도 되는지 의문일 때가 있다. 그럼에도 바란다. 부디, 제발, 안녕히, 간절히.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주인공 사치코는 좀처럼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총총 걷는 것 같지만 우다다 달리는 일이 더 많다. 회사에는 언제나 맵시가 단정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출근한다. 편집자인 그는 만드는 문예지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주어진 업무를 척척 해낸다. 사치코가 일하는 방식은 가끔 극단적일 정도로 요란하고, 엉뚱하고, 과감하다. 하지만 언제나 상대를 존중하며,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마치 안드로이드 로봇 같은 사치코에게도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결혼식 날 이유도 말해주지 않은 채로 도망친 애인 ‘슌고’를 생각하는 일이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집 한구석에 제단을 차린 다음 매일 아침 기도를 올려보지만,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린 그 사람을 잊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사치코에게도 ‘망각’의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으니! 바로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을 때이다. ‘맛있는 걸 먹으면 슬픔과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회사 앞 식당 고등어조림 정식을 먹으면서 깨달은 사치코의 맛집 탐방, <망각의 사치코>는 그렇게 시작된다.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면 내가 제일 망각하고 싶은 것은 실패한 사랑도, 회사에서의 실수도 아니었다. 단연코 잊고 싶은 것 1위는 ‘맛’이었다. 사실 나는 맛에 있어서라면 회 같은 날것부터 내장 요리를 비롯해 고수 같은 향신료까지 가리는 식재료가 너무 많고, 또 까탈스럽기까지 해서 비교적 잘 적응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불현듯 찾아온 질병과 극한의 식단관리는 종종 일상을 곤궁하게 만들었다. 자꾸 무언가를 빼고 더 빼다 보니 누군가와 함께하는 식사가 일상에서 멀어졌다. 공적인 자리에서 누군가와 식사할 때 내 처지를 설명하며 이해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자꾸만 생겨났다.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또는 싫어서 뭉뚱그려 이야기하고 나면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먹고 싶은 것이 눈치 없이 생겨나고, 가보고 싶은 곳이 한없이 늘어나면서 지도 앱에 찍어놓은 별표가 무지막지하게 많아졌지만 내가 섭취하는 것이 곧 나를 만드는 것이어서 내 몸을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포기하거나 어떻게든 타협 가능한 선에서 방법을 찾아 조금씩 맛보거나, 언제나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맛있게 먹는 영화, 다큐멘터리, 예능,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시청했다. ‘아는 맛이 더 무서운’ 법이어서 그런 걸 볼 때만큼은 내 처지를 잊을 수 있었다. ‘맛’을 망각하고 싶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떻게든 맛을 잊지 않기 위해 요리, 먹방, 식문화 콘텐츠를 참 열심히도 본 것이다. <망각의 사치코>는 그런 마음이 하늘을 찌를 때에 만난 드라마다.

사실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사치코에게 애인을 잊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12부작인 이 드라마 곳곳에 슌고 상이 불쑥 나타나 멋진 척 하는 모든 장면은 최대한 흐린 눈을 하고 봐야 한다…) 사치코에게는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는 게 중요하고, 퇴근 후 혀로 느끼는 총천연색 미각이 더 중요하고, 업무 태도가 방만한 편집장에게 장기자랑을 빙자해 힙합 정신으로 디스 랩을 날리는 일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을 미식의 세계로 눈 뜨게 해준 식당을 동료들에게 소개하는 일 역시 그렇다. 이유를 추측하기조차 어려운 이별 따위보다 일상을 즐겁고 풍요롭게 채우는 행복이 결국은 더 중요한 것이다.

사치코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에 미간을 찌푸리면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 내 친구들 말이다. 열심히 일하고 맛있게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을 사랑해서, 사치코를 사랑한다. 오늘따라 친구들과의 식사가 무척이나 그립다.

<길 위의 셰프들 : 라틴 아메리카>(2020)
Street Food : Latin America
OTT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감독 David Gelb, Brian McGinn
시놉시스
일상적인 삶에 활력과 위로를 주는 길거리 음식들. 전통과 현대를 모두 담은 최고의 맛은 쉽게 탄생하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 셰프들의 사연을 담은 다큐멘터리 시리즈
<망각의 사치코>(2018)
忘却のサチコ
OTT WATCHA, wavve, 드라마
감독 야마가시 쇼타
극본 오오시마 사토미
출연 타카하타 미츠키, 사오토메 타이치, 하야마 쇼노
시놉시스
완벽한 일 처리로 철의 여인이라 불리던 문예지 편집자 사치코. 하지만 결혼식 당일에 신랑 슌고가 실종되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되고, 그를 잊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