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를 탄 라푼젤, 성을 탈출하다
클로이(키에라 앨런)에게 집은 더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엄마 다이앤(사라 폴슨) 때문이다. 요 근래 클로이는 엄마의 행동이 어딘가 의심스럽다고 생각했다. 몇 가지 물증 역시 확보했다. 그러면서 분명해진 감각은, 엄마가 나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공포다. 클로이는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엄마로부터, 감옥 같은 집으로부터.
여기까지만 본다면 <런>은 별다른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는 영화다. 주인공은 위협을 느꼈고, 도망치겠다는 각오 역시 충만한 상태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러나 다음의 조건들을 인지하는 순간, 무언가 다른 결이 느껴질 것이다. 클로이에게는 중증 장애가 있다. 그는 홀로 걸을 수 없다. 천식, 혈색소증, 부정맥, 당뇨 등은 다리 마비 증세와 더불어 클로이가 안고 있는 다양한 질병이다. 집은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제대로 되지 않는 외딴 곳에 있다. 클로이는 홈스쿨링 학생이고, 홀로 외출하는 일은 없다. 모녀의 일상에 외부인과의 접촉은 거의 없다. 휠체어를 탄 도망자와 그의 동선과 병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추격자. 탈출은 가능할 것인가.
<런>은 스타일에 있어서 감독의 전작 <서치>(2017)와 거의 모든 면에서 반대를 지향하는 영화다. <서치>는 그야말로 ‘스마트 스릴러’였다. 스마트폰, 웹사이트, 메신저, SNS 등등의 플랫폼을 통해 사라진 딸을 찾는 아버지의 이야기. 감독은 스크린을 스마트폰이자 노트북 화면으로 활용했다.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주인공 데이빗(존 조)이 바라보는 구글맵, 페이스북, 이메일 서비스 화면은 관객이 바라보는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졌다. 여기에서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익숙해진 이들의 이중심리가 발생한다. 익숙한 기술들로 가능한 최첨단의 추적을 목격하는 쾌감과 이 같은 접근이 가능할 정도로 개인 정보가 흩뿌려진 시대를 살고 있다는 불안을 동시에 느끼는 영화적 경험. <서치>는 익숙한 서사를 형식적 측면의 새로움으로 극복한 영리한 기획이었다.
<런>은 다르다. 극 초반에는 엄마를 의심하게 된 클로이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신이 먹는 약에 대해 알아보려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영화라면 평범했을 이 전개는 한밤중에 다이앤 모르게, 2층에서부터 리프트를 타고 내려오는 클로이의 동선 탓에 한없이 쫄깃해진다. 위험을 무릅쓰고 어렵사리 노트북을 연 순간, 쿨로이가 마주하는 건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다는 야속한 메시지다. 관객의 기대를 유쾌하게 골탕먹이는 연출이자, ‘이번엔 다르다’는 감독의 여유 있는 자신감의 방증인 셈이다. 영화는 <서치>와는 정반대의 노선을 타고 히치콕과 M.나이트 샤말란 감독으로 이어지는 클래식 스릴러의 계보를 충실하게 따른다. 라푼젤 서사가 히치콕을 만난 결과물. 그것이 <런>이다.
아니쉬 차간티 감독은 최소한의 등장인물, 간결한 배경, 빠른 전개로 군더더기 없는 연출력을 선보인다. 반전의 재미를 선사하는 마지막 시퀀스까지 스릴러의 본분에 충실하다. 인터넷 장면의 농담처럼, 극 여기저기에 전작과 이어지는 이스터에그와 반전의 힌트들을 과감하게 배치해놓은 솜씨는 탁월하다. 감독은 진정으로 자신이 만든 <런>이라는 퍼즐 게임에 관객들이 기꺼이 뛰어들어 문제 풀기를 제안하고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감독이 장애와 인종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한계라 여겨지는 것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출발시키는 야심이야말로 이 감독의 영화적 동력이 아닐까 추측하게 될 정도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세계나 인물의 배경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굳이 하지 않는다. 영화는 휠체어를 탄 클로이라는 상징 하나만으로 장애가 있는 인물은 왜 스릴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지, 왜 누군가가 늘 도와줘야 하는지,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훌륭하게 질문한다. <서치>에서는 ‘왜 한국계 미국인 가족이 주인공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는 훨씬 자연스럽게 주류 문화의 인식으로 파고드는 방편이다. 백인 커뮤니티 영화를 보면서 아무도 ‘왜 주인공은 백인이죠?’라고 묻지 않듯이.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영화에서 진정 탁월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 같은 태도다.
Run
감독 아니쉬 차간티
주연 사라 폴슨, 케이라 앨런
시놉시스
태어날 때부터 장애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외딴 집에서 엄마와 함께 살며 일상을 보내는 ‘클로이’. 딸을 사랑으로 돌보는 엄마 덕분에 힘들지만 매일을 긍정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식탁에 놓인 장바구니에서 하나의 물건을 발견하게 되고 믿었던 모든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