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

<밥정>(2018)의 주인공인 ‘방랑식객’ 임지호 셰프는 영화 내내 극복할 수 없는 결핍을 채우려 노력한다. 어린 자신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돌아오던 길에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는 생모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에, 임지호 셰프는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한다. 혹시라도 생모를 알던 사람이나 생모의 먼 친척이라도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들이 자신의 요리를 먹으면 생모에게 밥 한 끼 대접할 수 없었던 아쉬움이 채워질까 봐. 한편 그가 돈과 무관하게 모든 상을 마음을 다해 차리는 것은 세상 모든 일에 진심을 다하라는 양모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생모를 향한 그리움으로 방황하며 밖으로 돌던 자신을 직접 낳은 자식처럼 아끼던 양모의 사랑을, 임지호 셰프는 다소 늦게 깨달았다. 임지호 셰프는 자신을 키우며 양모가 흘린 눈물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의 요리는, 얼굴도 모르는 생모와 너무 늦게 사랑을 알게 된 양모를 향한 그리움이다.

첫 번째 어머니와 두 번째 어머니의 임종을 모두 지키지 못했던 임지호 셰프는, 공교롭게도 ‘길 위에서 만난 세 번째 어머니’인 지리산 김순규 할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집 앞마당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난 김순규 할머니의 부고는 임지호 셰프에게 너무 늦게 닿았다. 황망한 마음으로 할머니의 집을 찾은 임지호 셰프는, 3일 밤낮을 헐어 김순규 할머니의 제사상에 올릴 음식 108가지를 준비한다. 멀미 때문에 멀리 나서지 못하고 평생을 한마을에서 살다 간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식자재를 모아와 집요하게 차려낸 그 제사상은 무참할 만큼 아름답다. 그리고 그 상이 무참할 만큼 아름다운 이유는, 역설적으로 상을 받을 어머니들이 모두 부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린 허기를 채워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이야기했으나, 내가 본 것은 극복 불가능한 어머니의 부재를 밥상의 힘으로 초극하기 위한 임지호 셰프의 허기였다. 어떻게 해서든 어머니의 빈 자리를 채우겠다는 집요한 허기.

영화는 “걸음 걸음이 그리움이었습니다. 만나는 인연이 모두 어머니였습니다. 누군가의 시린 허기를 채워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헌사로 끝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머니’를 ‘당연히 밥과 정을 베푸는 사람이어야 하는 존재’의 자리에 호명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거니와, 임지호 셰프의 여정 또한 정확히 그 반대 지점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임지호 셰프는 채워지지 않는 어머니의 빈 자리를 채우겠다는 불가능한 목표를 채우려다 보니 뭇 세상 사람들의 시린 허기를 채워주게 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평생을 찾아 헤맸던 사람은, 어쩌면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까. 자신과 밥과 정을 나눌 사람을 찾아 방랑해 왔으나, 정작 내내 밥과 정을 넘치게 나누었던 사람은 임지호 셰프 자신이었다.

<월터 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

1939년 『뉴요커』 지에 발표된 제임스 서버의 단편소설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속 월터 미티는, 평온하고 지루한 자신의 삶으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려 한다. 아내를 미용실에 데려가주는 차 안에서, 그는 전투 중인 공군 파일럿이 되는 공상을 했다가 응급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의사가 되는 공상을 하기도 한다. 공상의 끝에는 언제나 평범하고 소심한 중년 사내의 자리로 돌아오는 월터 미티는, 그렇기에 다시 또 공상 속으로 도피한다. 70년 넘게 사랑받은 이 현실도피의 서사를 영화로 옮긴 2013년작 <월터 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원작과는 다소 다른 길을 걷는다.

포토 저널리즘 잡지 『라이프』 지의 네거티브 필름 현상부서에서 16년째 근속 중인 월터 미티(벤 스틸러)는 원작에서 그랬듯 공상 속으로 도피하는 습관이 있는 소심하고 조용한 남자다. 그런 월터의 일상은, 웬 닷컴 회사가 잡지를 인수하고는 수익성을 이유로 브랜드만 남긴 채 종이 잡지를 폐간하기로 결정하면서 격랑에 휩싸인다. 월터와는 매번 필름과 편지로만 교류를 주고받던 전설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숀 펜)은 『라이프』 폐간 소식을 듣고는 ‘삶의 정수를 담은 한 컷’이니 폐간호 표지로 삼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필름 한 롤을 보낸다. 그러나 그가 콕 집어 이야기한 25번 컷은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고, 당장 그 컷을 찾지 못하면 해고당할 위기에 놓인 월터는 이제 공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모험을 해야 한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숀을 찾아가 필름의 행방을 묻기 위해 월터는 사진 속 단서를 조합해 그린란드로 날아가고, 아이슬란드를 거쳐 히말라야 산맥을 오른다. 만취한 파일럿이 모는 헬리콥터에 몸을 싣고, 상어가 득시글거리는 바다로 뛰어들고, 폭발하는 화산으로부터 도망가고, 무장 반군들에게 길을 묻는 여정 끝에 미티는 히말라야 설산에서 숀을 만난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우여곡절 끝에, 월터는 문제의 25번 컷을 찾아 발행 이틀 전에 『라이프』 지 사무실에 필름을 전달한다. 물론 달라질 것은 없다. 디지털 사진이 대세가 된 시대에 네거티브 필름을 다루는 월터의 해고는 이미 정해진 일이고, 『라이프』 지는 폐간될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통해 삶의 진실을 통찰하고 한계를 넘어선다는 『라이프』 지의 신념을 믿었던 월터는, 『라이프』 지의 마지막만큼은 숀이 삶의 정수를 담았노라 말한 25번 컷 사진으로 장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판대에 걸린 폐간호를 본 순간, 월터는 놀라고 만다. 전 세계를 누비며 화산과 해일, 야생동물과 전쟁터를 찍어온 숀이 말한 ‘삶의 정수’는, 바로 네거티브 필름 현상 롤을 들여다보고 있는 월터 자신의 사진이었다. 지루하고 소심했던, 살면서 가 본 타지라고는 피닉스와 내슈빌이 전부였던 책상 물림 중년 남자, 하지만 자신이 믿고 사랑하는 바를 위해서 평생을 헌신했던 남자의 초상.

우린 때로 우리 삶의 결핍을 채워줄 누군가가 등장하길 기다린다. 나의 고통을, 나의 외로움을,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쳇바퀴 같은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 마법처럼 치유해 줄 누군가가 등장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 온 존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안에 있었던 건 아닐까. 오랜 결핍이 불러내고 갈망이 키워낸 그를, 언젠가 거울 속에서 발견할 때가 있을 것이다.

<월터 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
감독
 벤 스틸러
주연 벤 스틸러, 크리스틴 위그, 숀펜
시놉시스
‘라이프’ 잡지사에서 16년째 근무 중인 월터 미티.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상상’을 통해 특별한 순간을 꿈꾸는 그에게 폐간을 앞둔 ‘라이프’지의 마지막 호 표지 사진을 찾아오는 미션이 생긴다. 평생 국내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월터는 문제의 사진을 찾아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등을 넘나들며 평소 자신의 상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어드벤처를 시작한다. 누구보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월터, 그 누구도 겪은 적 없는 특별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