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최유월

시간을 되돌려 볼까요. 흐린 하늘의 아침, 나는 아직 침대에 누워 일기예보를 들어요. 큰비가 내린다고 해요. 호우주의보와 함께 노약자는 외출을 자제하라는 뉴스가 나오죠. 이런 날은 해수욕장에도 사람이 드물 거예요. 해변의 파라솔은 접히고 샤워실 문도 닫히겠죠. 예전의 나라면 이런 날에 고요한 해변을 즐기며 바다를 바라봤을 거예요. 내가 있는 곳에선 비 오는 바다 풍경이 잘 보이니까요. 물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 조금씩 둘레를 넓혔다 사라지는 파동. 비는 바다의 나이테를 만들고 바다의 옷깃으로 스며들죠. 나는 이불 아래로 숨어들어 오늘은 당신을 기다리지 않겠다고 다짐해요. 기다리지 않겠어요. 지금은 아침, 밤이 되도록 다짐하고 연습하면 나도 해낼 수 있겠죠. 나도 전처럼 비 오는 바다와 잠결에 들리는 빗소리를 좋아할 수 있겠죠. 조금씩 둘레를 넓혀가는 마음. 대체 이 비는 왜 이리 소란스러울까요.

태양이 꺼지고 해변의 흰 모래 빛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폭죽을 터뜨려요. 거리엔 노점이 들어서고 소란스러운 바비큐 파티장이 펼쳐지죠. 이름 모를 가수는 빈 악기 통을 열어놓고 가로등 아래에서 노래하고 사람들은 노래를 들으며 연인의 허리를 끌어안아요. 당신은 그런 밤과 상관없다는 듯 파란 트럭을 타고 안개 속을 미끄러져 오죠. 같은 시간, 같은 길을 따라, 거의 매번 같은 셔츠를 입고서. 당신의 그 셔츠. 소녀와 소녀가 마주 앉아 붉은 과일을 베어 먹는 그림. 희고 붉은 색의 그 옷은 언제나 단정하고 희미한 과일 향을 풍기죠. 두 번 접어 올린 흙색 반바지와 모래가 묻은 회색 운동화. 아마 당신에겐 다른 옷과 다른 신발이 없나 봐요. 나는 그게 마음에 들죠. 언제, 어디서나 당신임을 알아볼 수 있는 당신의 외표(外表)들. 다른 것, 다른 시도를 포기하는 당신의 당신다움.

낮 동안 당신은 도시를 오가며 수박을 팔아요. 밤이 되면 해변의 가게에 차례로 들러 남은 수박을 싸게 주죠. 모서리가 둥근 파란 트럭을 타고 와 카페 앞에 멈춰요. 그런 다음 카페의 유리문을 열고 닫히지 않게 안쪽으로 열어놓죠. 당신이 오갈 공간을 마련해놓기 위해. 그러고 나서 다시 트럭으로 돌아가 수박 두 통을 들고 오죠. 한 손에 한 통씩, 다홍색 끈으로 둘레를 감싼 수박을 한 손에 한 통씩. 마치 잘 익은 지구를 옮기는 사려 깊은 신처럼. 당신에겐 수박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듯, 당신에겐 유리문과 탁자를 대하는 당신만의 규칙이 있다는 듯. 천천히 그것들이 놀라지 않게 당신 몸을 움직이죠. 그렇게 나를 지나쳐 수박을 놓고 가요. 그걸로 끝.

다시 나를 지나쳐 갈 때 나와 눈이 마주치면 당신은 가만히 웃어요. 그게 시작. 그 웃음이 내 마음을 놓게 했죠. 당신의 시간이 나를 안심하게 했어요. 당신은 늘 같은 시간, 같은 트럭을 타고 와 같은 옷을 입고서 아무것도 흩트려놓지 않고 떠나니까요. 그건 당신이 만드는 당신의 리듬. 나는 그 리듬이 좋고 그 리듬이 밉죠. 미워한다는 건 붙잡아둘 수 없다는 뜻이에요. 내 눈은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에 익숙하지만 당신의 리듬엔 모래처럼 마음이 쓸려나가죠.

나를 알기 위해 나는, 집과 고향을 떠나왔어요. 해변의 끝, 이 작은 카페에 머물며 더 멀리 갈 수 있기를 꿈꾸죠. 여름이 되어 당신의 트럭이 찾아온 후부턴 손님에게 나도 모르게 주스를 권해요. 비가 오든 해가 비치든 사람들이 더 많이 수박을 원했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당신이 수박 대신 다른 걸 팔 수도 있을 테죠. 오늘처럼 비 오는 날엔 꽃을 실어오는 것도 좋을 거예요. 어느 화원에 들러 줄기를 자르지 않은 화분들을 가져다가 해변을 지나며 파는 건 어떨까요.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내가 있는 곳에 올 때쯤엔 화분이 한두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을 거예요. 그 꽃은 내가 사겠어요. 내겐 그 꽃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까요. 당신에겐 나를 길들인 책임이 있듯이. 누구에게나 자기가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이 있죠. 나는 그 문장을 좋아해요. 그 문장을 쓴 비행기 조종사는 밤의 바다를 날아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배달했죠. 종이에 쓴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안개 낀 협곡을 지나고 빛 하나 없는 바다를 건넜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고작 호우주의보에 트럭을 세워둔 당신은요?

해변의 끝, 때론 여기가 내 몸의 끝인 것 같아요. 밤의 백사장은 작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숨겨 놓고서 나를 부르죠. 나는 맨발로 나가 모래밭에 엎드려 모래를 파요. 깊숙이, 들어가 누울 수 있을 만큼. 소금기 어린 밤의 목덜미에 뺨을 대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털어놔요. 모래 묻은 얼굴로 가로등이 선 길의 끝을 바라보죠. 조금씩 둘레를 넓혀가는 부드러운 괴롭힘. 문득 없는 당신의 트럭이 보이는 듯해요. 툭, 투두두둑. 비가 와요. 밤부터 내린다는 비가. ■

* 글의 제목은 ‘2012 월간 윤종신  3월호 <널 사랑해 오늘따라> wiht 김완선’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글의 시작과 끝에는 그 노래가 있습니다.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