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껏 살면 복이 와요
마흔이 불혹의 나이라니. 요즘 같은 세상에는 이해불가한 말이다. 40대가 뿌리 깊은 소나무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건, 아직 마흔이 되지 않은 나도 알겠다. 그럼 40대엔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그 답도 모른다. 다만 100세 시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기저기 부딪치며 방황을 일삼는 모습이 더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뿐이다.
어쩌면 이건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의 긴박한 태세 전환일지 모른다. 구체적인 계획도 없으면서 ‘되도록 산뜻하게 40대를 맞이하고 싶다’는 애매한 바람만 가지고 있던 나는, 어느덧 ‘구질구질하게 40대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실체 없는 불안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산뜻한 모습은 뭐고, 그게 아닌 건 또 뭘까.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관적인 판단에 구질구질하게 40대를 맞이할지도 모를 근미래의 나를 위해 변명은 필요했다. 인생의 절반도 안 살았는데 뭐 얼마나 그럴싸하게 삶이 완성됐겠어? 엉망이니까 40대다! 내 안의 궤변은 그렇게 완성됐다.
그러던 와중에 영화 한 편을 만났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제목의 명랑한 작품이었다. 주인공 찬실(강말금)은 마흔 살이다. 영화 프로듀서였던 그는 함께 일하던 감독의 돌연사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다. 한때는 “영화계의 보배”라고 그를 추켜세우던 사람들은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며 찬실이 지나온 시간들을 책망하듯 태도를 바꾼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애인도 없고, 당장 먹고 살 길까지 막막해진 찬실의 상황에는 제목과 달리 복이라곤 좀체 안 보였다. 나는 찬실의 상황이 당장 내게 닥친 것인 양 한숨을 푹푹 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박복한 찬실이가 가시밭길 같은 앞길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자못 신선했다. 매력적인 부산 사투리 억양을 쓰는 이 씩씩한 캐릭터는 이미 망한 건 망한 거고, 일단 뭐라도 해야 한다는 자세로 처음 겪는 상황들에 부딪치고 있었다. 친한 배우 소피(윤승아)가 “돈 빌려줄까?”라고 묻자 단칼에 “일을 해서 벌어야 한다!”고 거절하는 대목에서는 결기마저 느껴졌다. 이후 그는 소피의 집에 가사도우미로 취직한다. 산동네 셋방살이도 공기가 끝내준다며 위안 삼는다. 소피의 불어 선생님 영(배유람)에게 호감을 갖는가 하면, 한동안 잊고 있던 영화를 향한 자신의 초심도 되찾는다. 찬실의 눈에만 보이는 장국영(김영민)의 등장 덕분이다.
<아비정전>(1990)의 아비(장국영) 차림으로 나타나선 때론 찬실을 응원하고, 또 채찍질하는 이 남자는 실은 찬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진심의 반영이다. 그래도 당신에겐 영화가 있지 않냐고. 애초의 꿈 아니었냐고. 장국영의 존재 때문에라도 찬실은 영화를 놓지 못한다. 영과 단둘이 맥주 한 잔 하던 밤, 오즈 야스지로를 좋아하는 찬실은 자신의 취향과는 한참 동떨어진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영의 말에 기겁을 하며 실망한다. 비록 꿈이었지만 찬실이 10년 만에 처음 안아본 남자가 영이란 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하면 어떻고 주드 애파토우를 좋아하면 어떻단 말인가. 하지만 영화는 찬실에게 그런 것이다. 타협이 안 되는 사랑, 거짓으로 꾸며낼 수 없는 진심의 대상.
장국영의 추동에 힘입어 찬실은 “자신을 깊이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일상들에서 소박하지만 반짝이는 순간들을 발견한다. 한글을 배우는 주인집 할머니가 서툴게 꾹꾹 눌러쓴 시, “난 사실 그 감독 영화 많이 졸렸다”며 뒤늦게 고백하는 아버지의 편지, 공원에서 소녀 같은 웃음을 터뜨리는 할머니들, 나무에 매달린 모과들. 모든 것이 이전과는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시간은 찬실에게 오직 영화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 삶 안에 영화도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부터 찬실만의 이야기가 싹트기 시작한다.
찬실은 이 영화를 만든 김초희 감독의 분신 같은 캐릭터다. 영화 프로듀서로 오래 일하다 하루아침에 작업을 멈추게 됐던 것은 그의 경험이다. 감독은 찬실의 캐릭터에 자신의 모습을 녹여놓고, 또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첫 장편영화를 완성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라는 꿈에서 한 발짝 떨어졌을 때 그가 더 깊이 바라보고 느끼게 된 것들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는 마음. 영화 곳곳에서는 시련을 겪어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기운이 어른거린다.
찬실은 애초에 꿈이라도 있지 그마저도 없으면 어떡하느냐고? 주인집 할머니(윤여정)의 한 마디로 대답을 갈음한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어. 대신 애써서 해.” 걱정을 하나 안 하나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나의 40대를 수식할 형용사가 무엇일지 또한 여전히 미지수다. 그러니 앞으로의 삶은 그저 주인집 할머니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씩씩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닐까. 하루하루 정성스레, 하고 싶은 일들을 애써서 해가면서. 내가 좋아하고 나를 아끼는 존재들을 잊지 않으면서. 그러면 작은 돌멩이 같은 복 하나라도 떼굴떼굴 굴러오겠지.
LUCKY CHANSIL
감독 김초희
주연 강말금, 윤여정, 김영민, 윤승아, 배유람
시놉시스
집도 없고, 남자도 없고, 갑자기 일마저 똑 끊겨버린 영화 프로듀서 ‘찬실’. 현생은 망했다 싶지만, 친한 배우 ‘소피’네 가사도우미로 취직해 살길을 도모한다. 그런데 ‘소피’의 불어 선생님 ‘영’이 누나 마음을 설레게 하더니 장국영이라 우기는 비밀스런 남자까지 등장! 새로 이사간 집주인 할머니도 정이 넘쳐 흐른다. 평생 일복만 터져왔는데, 영화를 그만두니 전에 없던 ‘복’도 들어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