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통줍기 (3 PM)
우리는 풀밭에 누워 날아오는 물통을 보고 있었습니다. 간간이 날아오던 물통이 갑자기 마구 떨어지더니 산 여기저기로 굴러갔습니다. 벅지가 물통을 쫓아 뛰기 시작했습니다. 어깨에 멘 비닐 가방이 번쩍였지요. 저는 도로 누워 눈을 감았습니다. 물통 줍기가 귀찮고 창피해서 그런 체했지만, 아니었어요. 한 무리의 사이클리스트들이 터널로 빨려 들어가자 사악사악 도로를 얇게 베는 듯한 체인 소리도 멀어졌습니다. 그래요, 저는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눈을 감았어요. 내가 세상을 안 보면 세상도 나를, 내 심정을 안 보리라 믿었습니다.
“어떻게, 좀 건지셨어요?”
쓰레기 수거차에서 남자가 내리며 물었습니다. 펠로톤(peloton)이 지나가고 남은 쓰레기를 줍는 남자. 그는 프로답게 선수들이 버린 쓰레기를 빠르게 주우며 벅지를 힐끔댔습니다. “근데 뭐 한다고 그걸 주워요? 양놈들 침 묻은 물통을. 에이, 지지다. 지지.” 그는 바나나 껍질을 줍다가도 벅지가 물통에 다가가면 얼른 뛰어가 물통을 낚아챘습니다. 그렇게 따라다니며 치근댔지만, 벅지는 묵묵부답 물통만 주웠습니다. “이따 뭐 해요? 끝나고 뭐 해요? 네? 네? ” 그때, 무전기가 울렸고 — 이제 곧 언덕을 내달린 선수들이 결승선에 도착할 것입니다 — 그는 차를 몰아 터널로 사라졌습니다.
“년들아,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터널에서 핑크 물통이 굴러왔습니다. 벅지는 자전거에 올라탄 채 집게로 물통을 줍더니 넝마주이처럼 가방에 넣었습니다. 저는 텅 빈 도로 — 국제자전거대회로 차량이 통제된 — 에 홀로 서 있는 벅지, 속칭 벅지 여신을 뚫어지게 보았습니다.
제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겨울의 팔당댐에서였습니다. 전날 내린 싸라기눈으로 도로가 미끄러워 평소의 저라면 — 걱정 많고 라이딩 실력도 보잘것없는 — 집에서 로라나 탔을 겁니다. 그러나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워 무턱대고 자전거를 끌고 나온 길이었지요. 갓 이혼한 무렵이었습니다.
교회 권사님의 소개로 만나 삼 개월 만에 결혼한 남편과 저는 일 년을 못 채우고 헤어졌습니다. 남편이 바람이 났어요, 하고 말하자 권사님은 제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몇 번이고 “남자랑 손 한번 안 잡아본 이 귀한 아가씨를 내가 망쳤구나. 아까워서 어쩌누. 아까워서.” 하며 눈물지으셨지요.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하게 되었다, 란 시나리오는 남편에게서 나왔습니다. 남편도 저도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성격도 잘 맞고, 서로 신뢰하고 좋아했습니다. 섹스 면에서도 불만 없었고요. 섹스 리스를 섹스의 한 유형으로 받아들인다면요. 처음에 섹스를 해야 할까 해야만 할까 고민할 때 남편은 밝게 웃으며 까딱까딱 손짓하더니 말했습니다. “여보세요, 자매님. 요즘 누가 촌스럽게 섹스를 해.” 우리는 나란히 누워 한바탕 웃었습니다. 웃음 끝엔 어찌 된 일인지 눈물이 살짝 맺혔지만요.
그리도 잘 맞는 우리였건만, 왠지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같이 살아선 두 사람 다 행복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날로 강해졌고, 그렇게 저희는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남편은 손수 사모아 집 곳곳에 두었던 디퓨저 — 브랜드 이름이 도저히 기억나지 않네요. 프랑스제였습니다 — 를 챙기며 말했습니다. “전 부인, 가슴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잘 들어봐요, 내 사랑, 전 부인.”
그 말은 주술이 되어 저를 옥죄었습니다. 그날도 팔당까지 걸으며 (길이 미끄러워 자전거를 탈 수 없었습니다) 가슴에 귀를 갖다 댔지만, 그곳에선 황량한 바람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미사리를 지나자 발톱이 빠졌습니다. 바람은 거칠고, 피부는 얼어붙고, 안에선 열이 펄펄 났습니다. 정신이 혼미해 비틀대면 뒤에서 클랙슨이 울리고, 차에 받혀 자전거가 날아가고, 종아리에서 피가 나고. 휘어진 자전거를 끌고 하염없이 걸으며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실오라기같이 가느다란 말이 올라왔습니다. 너는 누군가를 마음 깊이 품어본 일이 없지…… 깊이 사랑한 적도 미워한 적도 없어…… 멀리 언 호수가 보였습니다. 언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남편과 제가 헤어진 이유는 서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제가 사랑에 무능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저를 흥분시키지 못했고, 저 역시 누구 하나 미치게, 타오르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친절하고 매끈매끈한 관계만 맺으며 뭐가 결여된 지도 모른 채 구멍 나 있었던 겁니다. 갑자기 그 사실이 무섭도록 또렷해지면서 외로움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젊은 남자 둘이 다리를 건너 제 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호리호리하고 잔 근육이 잘 잡힌 멋진 남자들이었습니다 — 스페셜라이즈드 에스웍스였지요, 물론. “털…… 킥킥. 거기 털. 킥.” 키득대던 그들은 울고 있는 저를 보곤 깜짝 놀라 “저건 또 뭐야.” 하더니 톡 쏘는 땀 냄새만 남긴 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거기, 벅지가 있었습니다. 하얀 저지와 빕을 입은 그녀가 다리 난간에 기대 얼어붙은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엉덩이……
벅지가 몸을 숙이자 흰 자전거 바지에 엉덩이골이 비쳤습니다. 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민망해서 눈물이 쏙 들어가고 곧이어 화가 치밀었습니다. 정말 싫어. 도대체, 왜, 흰 바지를 입는 거야. 너무 하잖아. 저런 여자라면 평소에도 레깅스 바람으로 돌아다닐 거야. 민망하지 않나요? 눈 둘 곳이 없잖아요. 겨우겨우 다스리며 살고 있는데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잖아요.
바닥을 보며 겨우 화를 다스리고 있는데, 어릴 적 기억 한 토막이 떠올랐습니다. 전도사님을 따라 지하철에서 전도하던 때의 일입니다. 꼬마 전도 전사, 그게 제 별명이었죠. 그때도 저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만 보면 죽도록 화가 났습니다. 다리를 향해 마구 달려가 다리를 붙잡고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이러고 다니지 마세요, 구원을 받으세요, 울며불며 매달리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도 이해 못 할 흥분에 휩싸여 벅지를 노려봤습니다. 시선을 느낀 그녀가 제게 다가왔습니다 — 사랑스러운 삼천리 첼로를 타고. “여자 혼자 자전거 타기 참 힘들어요. 그쵸? 우리 로드 여성 동지끼리 커피나 한잔할까요?” 그러곤 쭈그려 앉아 제 자전거에 공기압을 채워주었습니다. 동그랗게 말린 등뼈가 약하면서도 굳건해 보였지요.
그렇게 이어진 인연으로 벅지와 저는 물통을 줍게 되었습니다. 벅지는 자전거 대회가 열리면 선수들이 버린 ‘플라스틱’ 물통을 주우러 갑니다. 평생 물통을 사지 않고 주운 물통만 쓰겠다고 해요. 저는 환경주의자가 아닙니다. 여전히 비닐봉지를 많이 쓰고, 종이 빨대의 흐늘흐늘한 느낌이 싫고, 재활용도 엉망으로 하죠. 귀찮아요, 솔직히 그런 거. 그래도 언제나 그녀를 따라나섭니다.
우리는 대회가 끝나면 개최지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 라이딩을 해 집에 돌아갑니다. 그날 — 남자가 터널에서 욕한 날 — 도 물통을 잔뜩 짊어진 채 여관에 도착했지요. 적벽 건물에 목욕탕 표시가 붙은 오래된 여관이었습니다. 위생 상태가 걱정돼 오늘도 침대(또는 이불)에 침낭을 깔고 자야 하나, 생각하며 문을 열었는데 제복을 입은 노신사가 정중하게 목 인사를 하더군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노신사가 ‘후론트 데스크’라고 적힌 프런트 데스크에서 물었습니다.
“숙박하려고요.”
그가 팔자 눈썹을 지으며 뒤돌아 벽을 가리켰습니다. 벽에는 세계 시계와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한국 시계는 두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입실 : 오후 3시. 퇴실 : 오전 11시.
“아니 여기가 무슨 힐튼도 아니고……” 저는 주변을 둘러보며 얼버무렸습니다. 역시 낡은 여관이었습니다. 푸른 생수통에 먼지 쌓인 형광 조화가 있는. “그러지 마시고 일찍 들여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가 너무 피곤해서 그래요. 점심도 못 먹었어요. 빨리 씻고 그런데 사장님 여기 무슨 음식이 유명해요?” 노신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얼리 체크인은 불가합니다. 짐은 보관해드릴 수 있어요.”
노신사가 낑낑대며 자전거를 ‘후론트 데스크’ 뒤에 있는 작은 방, 비키니 옷장 옆으로 옮겼습니다. “절대 잃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그러곤 제 손에 보관증을 꼭 쥐여줬지요.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여관 앞마당에 있는 평상에 누워 시간을 죽여야 했습니다. 벅지는, 빨리 베이킹소다 풀어 물통 불려 놔야 하는데…… 하다가 잠들었습니다. 맑고 고운 코 고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습니다. 저는 누가 듣거나 말거나 떠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여행 최대의 적이 뭔지 알아?”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바로 세시 체크인이야. 십 년 전만 해도 열두시면 호텔에 들어갔어. 그러던 게 체크인 시간이 점점 늦어지더니 이제는 세시에 들어오래. 세시라니. 말이 되니? 너도 알지. 우리 이태리 갔을 때. 오전에 도착했는데 갈 데가 없었잖아. 호텔에 짐만 맡기고 알차게 관광하자, 했지만 그게 되니. 안 되지. 마음이 통 안 잡히잖아. 그래서 그냥 호텔 로비에 구겨져 있었지. 세시 입실. 짐 풀고 나오니 네시. 어디 똑바로 가기도, 저녁 먹기도 애매한 시간. 그래도 일단 먹자, 먹고 힘을 내자, 해서 식당에 가니 브레이크 타임. 여행 첫날부터 기분 완전히 잡쳤지. 세시 체크인이 그런 거야. 그리 잔인한 거야. 여행 최대의 적이라고. 안 그래? 내년에 스텔비오 그란폰도 갈 땐 말이지 아예……”
휘릭 휘릭 새소리 같은 코 고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노신사가 ‘00 초계국수’ 라고 적은 쪽지를 조용히 놓고 갔습니다. 저는 모로 누워 잠든 벅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좋아, 아름다운 오후야. 전 남편의 당부가 떠올랐습니다. 가슴의 목소리를 들을 것.
저는 이제 물통 줍는 날만 기다리며 삽니다. 물통을 주워요. 무섭고 애타고 황홀하고 아랫도리가 이상해지는 오후에.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