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 (2 PM)
나는 벌렸던 다리를 재빠르게 오므렸다. 무릎에 맞고 튕겨진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타일 위에 떨어졌다. 허리를 굽혀 천천히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가느다란 실금이 여러 갈래로 생겼지만 터치를 하거나 화면을 보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다가, 다행은 개뿔. 이 판국에 다행은 없다. 1시 30분. 규정에 의하면 식사시간을 겸한 휴게시간은 오후 2시까지였고 나는 30분 안에 사무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휴대폰의 잠금을 해제하니 직전에 읽었던 기사가 그대로 나타났다. 나는 액정 위에 몇 줄의 문장으로 적힌 기사를 눈으로 훑었다. 나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오후 2시가 되기 전에 종로구 일대의 공중화장실 중 한 곳에 폭탄을 설치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내용이었다.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질이 좋을 리가 없는 인터넷커뮤니티에 테러를 예고하는 글이 익명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기사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감정이 쫙 빠진 담담한 문체 때문에 신뢰가 가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테러라니. 그것도 공중화장실에 테러라니. 나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읽었던 내용을 읽고 또 읽었지만 기사에는 테러의 목적이나 방식이 적혀있지 않았다. 화장실은, 그러니까 여기는 뱉거나 싸거나 내리거나 닦는 곳이지 무언가를 터트리는 곳은 아니지 않나? 간혹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나기도 하지만 그건 또 여러 의미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는 증거이지 않을까? 나는 멍하니 휴대폰 액정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화면이 어두워지더니 검은 화면 한쪽에 다시 시간이 떠올랐다. 1시 34분. 어느덧 4분이 지나갔다.
이곳은 회사가 가깝고 공중화장실답지 않게 무척이나 깔끔한 곳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해 줄을 길게 설 필요가 없어 자주 이용한다. 앞의 두 칸에는 비대가 달려있고 나는 그 두 칸을 주로 애용해왔다. 하지만 오늘은 두 칸 모두 전 사용자들이 물을 내리지 않아 변기 내부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미 그 대목에서 나는 어떤 불안이나 불길함을 느끼고 이곳을 벗어났어야 했다. 여기는 회사가 가깝고 공중화장실답지 않게 깔끔한 곳이며 사람이 적어 줄을 서거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빌어먹을 종로다.
이게 다 오대리 때문이다.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생이지만 이것이 다 사회생활이라고, 그러니까 잘 보여야 한다고, 여기저기 인사를 시키고, 아침부터 커피며 다과를 준비해 회의준비를 하고 인계나 교육을 해주지도 않고 멍하니 앉아있게 하고 네가 하는 일이 도대체 뭐냐는 소리를 듣고 커피를 타고 커피를 타고 억울하게 또 커피를 타고. 오전 근무시간 내내 회사 휴게실에서 커피를 탔지만 단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터질 것 같은 방광과 과민성대장증후군에 시달리며 휴게시간이 되자마자 달리고 달려 도착한, 이곳이 내 진짜 휴게실인데. 도대체 왜 멀쩡한 화장실에 폭탄을 설치하려고 할까? 차라리 회사 휴게실에 폭탄을 설치한다면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나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음먹은 적이 있으니까.
만족스럽게 배변하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다. 폭탄을 설치할 거라는, 그게 사실이어도 이 화장실일 거라는 확신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계속 여기에 머무는 것은 너무 찝찝한 일이다. 끝낼 때가 되지 않아도 끝내야 하는 일이 세상에는 아주 많고 그렇다면 퇴사를 할까, 고민을 하며 물을 내렸다. 그러나 변기의 레버를 누르면 마땅히 들려야 하는 그 변화의 물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몇 번이나 레버를 아래로 밀어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왜 앞선 두 칸의 변기가 모두 그 모양이었는지 의문이 드디어 풀렸지만 그딴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어떤 의문은 해결되는 그 자체로 더 큰 절망을 안겨주기도 하는구나.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1시 45분. 내리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다.
그러나 벽에 걸린 갈색 휴지 심을 아무리 돌려봐도 하얀색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짧지만 깊은 고민 끝에 물은 내리지 않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했지만, 이건 안 되지 않을까? 닦지 않고 회사까지 돌아갈 수 있을까? 가지 않으면 폭탄이 설치될 수도 있는데 가지 않을 수는 있나? 1분이라도 늦으면 어떻게 될까? 근무 시간에 내가 화장실에만 가도 한숨을 쉬는 오대리의 잔소리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내게 이런 고민을 하도록 만든 것이 도대체 뭘까? 그런 게 있어도 되는 걸까? 여기는 내 휴게실인데. 하루 종일 남의 휴게실에서 일하다가 좀 쉬어보려고 왔는데 도대체 왜 자꾸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쉴 수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물을 닦아내고 엉거주춤 몸을 숙여 문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뚜렷했다. 역시 그렇구나.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이제 저 사람에게 휴지를 빌려 닦고 구청에 민원을 넣어 물을 내리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두드리려던 손이 허공에 멈춘다. 아니다. 오늘의 이곳은 불행으로 가득 찬 미지의 장소, 염치없이 희망만 빠져나간 판도라의 상자 속이다. 애초에 왜 내가 불행해졌는지를 기억해내야만 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구세주 같던 발소리의 동선이 수상쩍기 짝이 없다. 발소리의 방향은 싸는 쪽도 씻는 쪽도 아니다. 그저 어슬렁어슬렁 화장실 곳곳을 배회할 뿐이다. 갑작스럽게 무거운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화장실은 싸거나 씻거나 폭탄을 설치하는 곳이다. 저 사람이 싸지도 씻지도 않을 작정이라면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지금 바지를 입지도 않았고 입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경찰이 아무리 빨리 온다고 해도 놈이 이곳을 빠져나가 폭탄을 터트리는 속도보다 빠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들지는 않았다. 시간을 확인했다. 1시 50분. 이제는 정말 망설일 시간이 없다. 내가 스스로 해내야만 했다.
잠금장치를 풀고 거칠게 문을 열었다. 허벅지에 엉거주춤 걸친 바지와 팬티는 잠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두 눈을 꼭 감고 온힘을 다해 놈에게 달려들었다.
야, 이 새끼야! 이 시간에 화장실에 폭탄을 깔아? 할 짓이 그렇게 없냐? 물론 너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새끼야, 똥 끊었잖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놈과 내 몸이 세면대 위로 쓰러졌다. 나는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얕게 파인 눈가의 주름을 따라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한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눈물을 닦는 파리한 손을 심하게 떨며 남자가 물었다.
도대체 뭔가요? 저는 그냥 일을 하러 왔는데요. 여기는 제가 일하는 곳인데요. 저는 매일 일을 하는데요. 어제도 했고 내일도 아마 하지 싶은데요.
여기서 일을 하다니. 여기는 내 휴게실인데 도대체 무슨 말일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닥에 널브러진 청소도구와 엎어진 쓰레기통을 눈으로 훑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테러는요?
몰라요.
테러 안 해요?
몰라요.
남자는 울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팬티와 바지를 한 번에 입고 서둘러 몸을 돌려 나왔다. 닦지 않았고 그래서 부끄럽지만 훨씬 더 부끄러운 일이 일어났으므로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시간은 자꾸만 흘렀고 나는 오후 2시까지 나의 일터로, 누군가의 휴게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늦지 않도록, 그래야 했다.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
1 comment
또 읽어도 또 재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