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그때의 나에게
영화의 첫 장면. 기차는 설원의 풍경 위를 달리는 중이다. 목적지는 어디일까. 누가 이 기차를 탄 것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잠시 후 카메라는 방을 정리 중인 노년 여성을 비춘다. 그는 탁자에 놓인 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봉투 겉면에 쓰여있는 이름을 가만히 발음해본다. 윤희. 행동으로 봐서는 노인이 직접 쓴 편지 같지는 않다. 잠시 후 눈 쌓인 길을 걸어가던 그는 우체통에 편지를 집어넣는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다시 걸음을 재촉하던 노인의 한 마디는 일본어다. 그러고 보니 눈이 가득 쌓인 풍경은 일본 홋카이도 지역의 그것이다. 편지는 누가 쓴 것일까. 이곳에 살고 있는 그 누군가는 왜 한국의 윤희라는 사람을 찾을까. 노인이 발견하기까지 편지는 왜 부쳐지지 않았던 걸까. 윤희는 어떤 사람일까.
편지를 시작하는 방식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겠으나, 대부분 받는 이의 이름을 적는다. 이걸 떠올릴 때 <윤희에게>의 구성은 탁월하게 느껴진다. 제목부터 윤희라는 사람을 부르며 시작한 이 영화는, 누군가 보낸 편지에 윤희(김희애)가 화답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영화는 윤희가 스스로 지난 세월을 그리고 현재를 찬찬히 돌아보게 한다. 관객은 여러 궁금증들을 안은 채 내밀한 편지글을 엿보듯 윤희의 삶과 심리를 공유하게 된다.
윤희는 시간과 말(言)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세상이 가로막은 사랑은 그의 시간을 과거에 멈추게 만들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으로 지내온 그는 내내 식물처럼 살아왔다. 눈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철길처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시간으로 과거를 묻어뒀다. 일본에서 온 편지를 먼저 발견한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이 편지의 존재를 비밀에 부친 채, 윤희에게 발신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여행을 제안하기까지.
영화의 초반, 윤희가 등장하는 장면들에서는 외로움이 배어 나온다. 영화의 소재와 배경 모두 윤희와 주변 사이에 조심스러운 거리감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부치지 못한 편지’라는 소재는 핵심적이다. 편지는 상대에게 속 깊은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도구이지만, 전달하지 않는다면 혼자만의 메아리에 그치고 만다. 아마도 윤희에게 편지를 쓴 이는 오래도록 가슴 속에만 그 글을 묻어두고 있었을 것이다. 편지가 발송된 일본 오타루라는 배경도 마찬가지다. 마음만 먹으면 비교적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지만 멀게 생각하면 한없이 먼 곳이다.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계속해서 발생하는 이 거리감은 애틋하다.
<윤희에게>는 임대형 감독의 전작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7)와 마찬가지로 담백하지만, 동시에 애수의 감정이 물씬한 작품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주인공 모금산(기주봉)은 암 선고를 받은 이후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연기까지 도맡는 무성영화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를 완성하고 싶어 한다. 인생을 돌아보고, 세상을 떠나기 전 삶에 색다른 방점 하나를 찍고 싶어서다. 찰리 채플린을 좋아하던 아내, 영화를 찍는 아들 스데반(오정환)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자신이 지나온 회환의 시간들을 끌어안는 과정. 모금산의 영화 찍기는 그래서 조금은 서글프고, 대부분 뭉클하다.
<윤희에게>의 윤희와 새봄 역시 길을 떠난다. 당사자들이 모르게 편지의 발신인과 엄마를 만나게 하려는 새봄의 깜찍한 계획이 진행되는 사이, 윤희는 깊이 묻어두었던 과거의 시간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 마주한다. 이전과는 다른 숨을 천천히 뱉어내는 듯한 윤희의 모습 역시 조금은 서글프고, 대부분 뭉클하다. 다행인 것은 윤희가 길을 떠날 용기를 냈으며, 그의 곁에는 윤희를 움직이게 하는 씩씩한 딸 새봄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살을 가르듯 고요히 앞으로 나아가는 윤희의 뒷모습에는 전에 없던 기운이 어른거린다. 요란하지 않은 그 전진 끝에 윤희는 답장을 쓴다. <윤희에게>는 윤희가 쓰는 그 편지의 마지막 한 마디를 위해 달려가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을 잃었던 윤희는, 이제 제 목소리를 내어 무언가를 말한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한 겨울이 되면 그리운 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느덧 그런 계절이다. <윤희에게>의 숨결은 계절을 닮았다. 그리운 대상을, 그와 함께하던 그때의 나를 떠오르게 하는 힘이 따뜻하게 배어있다. 문득,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윤희가 그랬듯이.
Moonlit Winter
감독 임대형
주연 김희애, 김소혜, 성유빈, 나카무라 유코
시놉시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윤희’ 앞으로 도착한 한 통의 편지. 편지를 몰래 읽어본 딸 ‘새봄’은 편지의 내용을 숨긴 채 발신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여행을 제안하고, ‘윤희’는 비밀스러웠던 첫사랑의 기억으로 가슴이 뛴다. ‘새봄’과 함께 여행을 떠난 ‘윤희’는 끝없이 눈이 내리는 그곳에서 첫사랑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