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최유월

질펀히 흐를 용(溶)자를 쓰는 용수를 태운 비행기가 막 활주로에 들어섰다. 몇 시간 전보다 빨라진 시각과 낮아진 기온을 안내하는 기장의 멘트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승객들은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객석 위 짐칸에서 자신의 짐을 찾아 내렸다. 면세품이 담긴 쇼핑 봉투나 여행용 가방, 외투 따위를 손에 든 사람들이 출입구를 향해 돌아서자 통로에 긴 줄이 생겨났다. 용수는 나란히 붙은 세 개의 좌석 중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복도 쪽에 앉아 있던 남자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통로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평온해진 얼굴로 출입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남자를 빤히 보고 있던 창가 쪽 여자가 갑자기 조급해져서 자신의 행로를 막고 느긋하게 앉아 있는 용수를 힐끔거렸다. 인생 복불복, 재수가 없으려니 느림보 옆에 앉게 되었고, 고통을 겪는 건 이 느림보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여자는 용수의 움직임을 곁눈으로 주시하며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이삼 분 동안 능동적으로 살겠다던 수 없는 밤의 다짐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더는 수동적으로 앉아 그가 일어나기만 바라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동적으로 사는 것은 심각한 피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뿐이며, 그 피해를 당하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고스란히 자신이라는 것을 여자는 많은 경험을 통해 알았다. 그런 생각에 휩싸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너무 급작스럽게, 그것도 너무 벌떡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다시 앉을 수도 없었다. 머리 위 짐칸 때문에 이미 우스꽝스럽게 구겨진 몸은 돌이킬 수 없다 치고, 체면까지 구겨지는 것은 막아야 했다. 게다가 다시 앉는 것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무 내색도 하지 못하는 모욕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였으며 고통을 주는 상대방에게 오히려 시간을 내맡긴 채 멀뚱거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일어섰다가 다시 앉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앉아 기다리는 것에 비하면 더 큰 굴욕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 모든 갈등 상황의 발생 원인이 옆자리에 앉은 느림보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그래서 여자는 대놓고 용수를 노려봤다. 일어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구부정한 자세로 용수를 빤히 내려다보는 여자의 눈에서 안광이 쏟아졌다.
용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여자의 시선 때문에 왼쪽 정수리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왼쪽 정수리에서 시작된 불길은 왼쪽 뺨으로 이어졌고, 왼쪽 어깨까지 화르르 번져 급기야는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용수는 그러나 여자의 시선을 알은체하거나 통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틈 없이 꽉 찬 사람들 사이로 몸을 비집어 들어가는 것은 평소 그가 실천하는 방정한 행동의 체계가 아니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체계는 시험을 받는 거였다. 그는 시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이 아니고 싶었고, 당장 통로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며 복잡한 상황에서 원치 않는 상황의 내부로 껴 들어가는 것은 그의 취향이 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모른 체하기로 했다. 그런 생각에 휩싸여 그는 취향에 대해 생각해보려 했지만 점잖은 취향이라는 단어만 머릿속에 굴러다닐 뿐 취향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시고 짜고 맵고 단 차이를 만들어내는 조미료의 세계와 코끝에서 혀의 돌기들과 교류하는 향신료의 세계를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면서도 여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보다 더 조급하다는 듯 통로 쪽을 괜히 여러 번, 뒤에서 앞까지 찬찬히, 그러고 나서 앞에서 뒤까지 죽 훑어보고는 자신도 통로에 늘어선 대열에 합류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어쩌면 그쪽보다 더 통로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보이는 쪽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용수의 마음속 깊은 데서 통로에 늘어선 사람들 사이로 껴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다. 없던 결의가 생겨나자 몸이 알아서 긴장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용수는 여자의 시선과 상관없이 품위를 잃지 않고 통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여행 가방, 면세점 봉투 사이로 어떻게 들어설 수 있을지 고민했고, 고민하는 기색을 감추려고 느긋하게 행동했다. 느긋하게 뒤를 돌아봤고, 느긋하게 시선을 돌렸고, 느긋하게 앞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느긋하게 통로에 들어찬 사람들을 훑어봤다. 출입문이 열렸다. 용수는 그제야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통로로 빠져나왔다. 창가 쪽 여자는 원망스럽다는 듯 용수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그의 어깨를 밀치고는 앞으로 뛰어나갔다. 줄 선 사람들 뒤에 바짝 붙은 여자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용수도 그 뒤에서 고개를 빼 들고 출입문 쪽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여자의 시선과, 거기에 신경 쓰던 자신을 잊어버렸다.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