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최유월

그들은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새벽 네 시 반. 취한 자도 우는 자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지인은 팔 위에 고개를 얹고 거의 감긴 눈을 힘겹게 깜박였다. 기진은 자신의 무릎 위에 앉은 루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진이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그만 들어가. 지인은 잠이 묻은 목소리로 답했다. 너나 들어가. 벌써 삼십 분 째 반복되는 장면. 루키는 이따금 작고 까만 눈을 들어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 갑자기 지인이 벌떡 일어섰고 기진의 무릎 위의 루키도 일어섰다.

휘청휘청 걷는 지인의 뒤를 기진이 따라갔다. 그 일정한 간격 사이를 루키가 오고 갔다. 계단 하나 오르고 주저앉고 계단 둘 오르고 잠깐 울고 계단 셋을 오르다 넘어질 뻔하는 지인. 겨우 도착한 현관 앞에서 바닥에 떨어진 옷처럼 허물어지고 만다. 루키가 안간힘을 다해 벽에 부딪치려는 지인의 어깨에 몸을 비빈다. 지인과 루키의 등 뒤를 비추던 센서등이 꺼지고 현관에 몸을 기대고 정물처럼 앉은 두 개의 그림자는 더 어두워졌다. 기진이 도어락에 손을 댔다. 비밀번호를 잊었지만 손끝이 기억하는 패턴. 문이 열렸다. 기진은 놀랐고 헛웃음이 났고 이윽고 슬퍼졌다.

광고회사에서 인턴 일을 시작하기로 한 기진은 자신을 ‘실패한 가수’라고 소개했다. 노래 한 번 들어봅시다,라는 요청에 괜히 실패한 게 아닙니다,라고 거절하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더는 노래하지 않을 거야. 기진은 기타를 케이스에 넣고 지퍼를 올렸다. 지인은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내 기진에게 건넸다. 기진은 지인의 손을 뿌리쳤고 기타는 바닥에 떨어졌다. 둘은 금이 간 기타를 바라보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진은 홍대 지하실에 위치한 소규모 인디클럽에서 오디션을 보고 어쩌다 공연에 올라 열 명도 되지 않는 관객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어떤 관객도 관심 갖지 않는 기진의 노래에 마음을 뺏긴 한 명의 사람이 지인이었다. 낙담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는 기진의 곁에 지인은 다가가 마음 다해 감상을 전했고 허락해주신다면 매니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가수와 매니저가 되기 전 둘은 연인이 됐다. 함께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만들어 가장 먼저 들려주고 들어주는 사이가 됐다. 기진의 시추 루키는 어느 순간부터 기진보다 지인을 더 좋아했고 둘은 함께 살기로 했다.
이게 다 루키 때문이야.
누가 뭐래.

기진은 힘들게 음반을 냈다. 첫 달엔 담배 한 갑 살 정도의 수입이 생겼다. 부쩍 말수가 줄어든 기진에게 매니저 지인은 다음 달엔 소고기를 먹을 수 있을 거야. 파이팅을 외쳤다. 하지만 다음달엔 수입이 더 줄었다. 기진은 더 이상 멜로디를 만들지 않았고 지인이 쓴 가사를 읽으려 하지 않았다. 루키는 둘 사이에 외로운 섬처럼 주저앉아 잠들곤 했다.

그래서 헤어진 건 아니지만 그래서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인은 작은 콧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고 기진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피곤한 눈으로 지인의 방을 둘러봤다. 일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지인이 있다는 사실에 기진의 손끝이 저렸다. 루키가 기진의 손을 핥는다. 따뜻한 혀가 기진의 마음속으로 쑥 들어오는 것 같아 하마터면 울 뻔했다. 계절 다섯 개가 흘렀는데 지인의 방은 똑같았다. 하늘색 커튼과 보라색 이불, 책장의 책들과 무늬 없는 접시, 냄새와 분위기, 깜깜한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선의 화면 보호기까지 마지막 그날과 똑같다.

루키 데려가.
루키는 널 더 좋아했잖아.
데려가. 더 키울 수 없어.
무슨 일 있어?
데려가.

지인은 웅크리고 누워 몸을 떨었다. 추위를 느끼고 나무 속으로 파고드는 설치류처럼 필사적으로 보였다. 하필 나 같은 걸 만나서. 기진은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들어 지인을 덮었다. 고요한 방 한가운데 서서 지인을 바라봤다.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들이 생각났다. 실망과 절망. 그것을 감추기 위해 못된 말을 하고 나쁘게 행동했다. 루키는 책상 위에 있었다. 루키야. 가자. 루키는 눈을 뜨지 않았다. 루키를 안으려고 팔을 뻗었는데 루키는 기진의 손을 거부하고 책장이 있는 책상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마우스가 움직였고 화면보호기가 사라졌다.

기진은 멍하게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앉았다. 뮤트된 노트북에서 기진의 첫 번째 앨범 전곡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기진은 호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노트북에 꽂고 뮤트 버튼을 해제했다. 일 년 만에 듣는 자신의 타이틀곡을 3분 47초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가사에 나오는 커튼과 배게, 포스트잇과 연필 다 지인의 방에 있는 것들이다. 기진은 책상에 엎드렸다. 새벽 여섯 시. 창밖은 벌써 하얗다.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었다. 루키야 오늘은 너를 데리고 갈 수 없을 것 같아.

루키는 고요한 방을 느리게 돌아다녔다. 침대에 잠든 지인의 곁에 조금 있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든 기진 곁에서도 조금 있었다. 루키는 잠든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루키는 생각을 그만두고 물그릇에 담긴 맑은 물을 마시고 지인과 기진 둘 사이 어디쯤에 앉아 눈을 감았다. 꿈을 꾸었고 꿈에서 지인과 기진 모두를 만났다. 반가웠으나 짖지 않았다. 꿈이라는 것을 알았고 희미하게 들리는 기진의 노래가 듣기 좋았기 때문이다.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