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음악감상단
첫 번째 트랙은 폴 모리아. 에이브 전집과 더불어 제법 고가에 해당하던 카세트테이프 전집이 입수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응답하라’ 식의 통속 필터를 끼워 본다면, 당시 서울 입성에 성공한 서민 가정의 표상물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계로 바쁜 구매자들은 그 존재조차 잊은 듯했고, 다락 한구석에서 먼지와 한 몸이 되어가던 음악을 구출한 건 세 아이였다. 그 다채로운 ‘이지 리스닝의 결정판’(해설서의 메인 카피)은 세 자매가 만든 놀이극의 배경음악이 되었다.
등장인물이 셋뿐이라, 누구 하나 입 나올 일이 없다는 게 강점인 극이었다. 치렁치렁한 이불 망토를 두른 채 여인숙에 나타난 나그네에게 주인은 이곳에 동물을 들이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나그네는 알겠다고 답한 뒤 방을 빌리지만, 자꾸만 들썩이는 이불을 의뭉스럽게 여긴 주인이 불시에 망토를 들춘다. 그러자 그 안에 숨어 있던 강아지가 발각되고, 함께 내빼는 두 존재를 주인이 뒤쫓는다.
초반에는 폴 모리아 악단의 연주음이 잔잔하게 깔리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들통이 난 뒤 빠른 리듬으로 변주되며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섞였다. 세탁한 이불을 끌고 다녔다고 엄마에게 등짝을 얻어맞을 때까지 역할극은 리듬감 있게 상연되었다. 둘째는 가위바위보 룰을 무시한 채 역동적이고 비밀스러운 캐릭터인 강아지 역할을 맡겠다고 떼쓰다가, 논리적인 첫째에게 논박당하고 벌컥 성을 냈다. 기 센 언니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셋째가 슬그머니 테이프를 재생했다. 달칵, 소리와 함께 잔잔하게 흐르던 경음악은 분위기를 전환하면서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혔다.
두 번째 트랙은 유키 구라모토의 <Lake Louise>. 첫째는 수험생들의 필수품이던 엠시스퀘어를 교과서처럼 활용하는 모범생이라 음악을 들을 짬이 없었다. 마지막 귀가 차량이 운행하는 새벽 2시까지 집중하는 첫째를 힐끔거리면서 라디오 청취에 골몰하던 둘째는 간헐적 터울로 반성에 잠겼다. 그러곤 새삼 라디오를 끊기로 결심하고 셋째에게 집중이 잘되는 음악을 추천받았다. 명료하고 섬세한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터치가 귓가에 울려 퍼지면 어느 산사 옆 호숫가에 앉아 있는 듯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첫째가 깨우러 올 때까지 책상에 엎드려 숙면할 수 있었다. 이어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로 넘어갔다. 고요한 독서실에서 기승전결이 확실한 음악에 심취하다 보니, 어느덧 눈 쌓인 풍경이 떠오르면서 가슴 한편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첫째가 수험생 생활에 충실하고, 둘째가 놀고, 셋째가 뭔가 사부작사부작하는 사이 넷째가 태어났다.
이즈음 네 자매의 풍경은 겹치지 않는다. 인턴 생활로 바쁜 첫째는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자취를 시작한 둘째는 어느 날 집에 들렀다가 새로운 음악과 마주했다. 푸딩의 <Maldive>. 꽉 닫힌 셋째의 방에서 음악이 새어 나오기에 방문을 열어보았더니 암흑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쉴 새 없이 깜빡거리며 셋째와 넷째가 춤추고 있었다. 다섯 살배기 넷째는 그렇다 쳐도 못지않게 방방 뛰는 셋째가 염려됐다. 순하고 성실하며 지적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어른들의 찬사에 꽁꽁 묶여 성장한 셋째가 내심 걸리면서도 제대로 물어본 적 없었다. 다만 불 꺼진 방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방방 뛰는 두 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안심이 됐다. “언니, 난 이 노래가 너무 좋으니까 몰디브에 갈 거야.”라고 말하는 넷째에게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그 섬은 물에 잠기고 있다고, 네가 빨리 크지 않으면 다 잠겨버릴 거라고 말해주면서 왠지 심술궂은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즈음 두 번째 달이 나타났다. 한 드라마에서 <서쪽 하늘에>를 들은 순간부터 네 자매는 순차적으로 사랑에 빠졌다. 언젠가부터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각자 귀에 꽂는 음악이 달라진 터라, 무언가를 함께 듣는 건 오랜만이었다. 첫째가 두 번째 달 공연장에서 넷째에게 미래의 형부를 소개시켰을 때도, 둘째가 배낭여행을 갔을 때도, 셋째가 음악 페스티벌에서 일하다가 첫 연애를 시작했을 때도 배경음악은 ‘두달’이었다. 집에서는 모두 모이기가 어려웠지만, 공연장에서 자주 뭉쳤다. 짧고 굵은 2년이었다. 보컬인 린다는 아일랜드로 귀국했고, 나머지 멤버들은 두 팀으로 나뉘었다. 그 음악처럼 닿을 순 없지만 꿈꿀 수 있는 곳으로 떠나갔다. 제일 먼저 집을 떠난 사람은 첫째였다. 둘째, 셋째가 뒤따랐다.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2010년으로 넘어와 넷째가 라 벤타나의 <Liber Tango>를 추천했다. 이 초딩은 대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 건지 의아할 만큼 제대로 탱고였다. 토요일 봄밤, 네 자매가 국립극장의 계단에 기대앉아 함께 들었다. 해가 기울면서 어둠이 깔리자, 선선한 밤공기 안에서 음악만이 부릴 수 있는 자력이 발휘되었다. 넷 다 추위를 많이 타는 탓에, 손을 맞잡고 손등을 비벼주며 들었다. 지하철역에서 헤어질 때 앞으로는 자주 함께 듣자고 약속했다.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
두 번째 달이 돌아왔다. 원년 멤버가 모였지만, 음악은 이전과 달랐다. 2집 타이틀은 ‘그동안 뭐 하고 지냈니?’였다. 다시 공연장에서 함께 듣자고 다짐하는 사이, 아이들이 태어났다. 넷째가 성인이 되었다. 뒤이어 나온 국악 프로젝트 ‘판소리 춘향가’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살아냈고, 음악도 그만큼 흘렀다는 게 위로가 됐다. 그런 생각을 하다니 꼰대 같다고 자조하며 새삼 나이를 자각했다. 첫째는 성가대 이후로 놓았던 기타를 배우고 있고, 둘째는 여전히 책을 만든다. 셋째는 인생의 전환점 같다며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고, 넷째는 인생에서 덕질이 가장 치열하다. 계절이 바뀔 즈음 네 자매의 단톡방에는 여지없이 ‘요즘 뭐 들어?’라는 질문이 올라온다. 하나둘 곡명이 떠오르며, 다시 트랙이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