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최유월

그즈음 나는 무언가를 기억해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삼십 칠년 여 만에 한국에 온 미국인 여성에게 옛 극장들을 안내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첫날, 그는 종로 3가 유니클로 앞에 서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것인가 했지만 이제는 롯데시네마가 된 단성사 극장을 찾고 있는 거였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그저 유달리 기억력이 좋군요,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삼십 칠 년 전 한국에서 식민지 조선의 영화 산업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명보극장이라고 있었는데”
명보극장이라면 중구청 사거리에서 종로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극장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내게 극장이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지점이었다. 그곳에서 명동, 을지로 방향으로 조금만 더 걸으면 냉면이 유명하지만 사실은 닭무침도 맛있는 평래옥이 나오고 나는 그곳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의자가 아주 좁아서 항상 겸손한 자세로 영화를 봐야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형을 가진 노년 여성이었다. 그런 그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고개를 죽 뺀 채 영화를 봐야 하는 극장의 크기를 상상했다. 삼십 칠년 여쯤 된 일이라니, 그러면 내가 유튜브에서나 우연히 보았던 ‘적도의 꽃’이나 ‘맨발의 청준’과 같은 영화들을 극장에서 본 것일까. 그런 영화들이 오늘도 상영되고 내일도 상영되는 그런 시대의 서울은 어땠을까. 혹 기억에 남는 일이 장소 외에 더 없냐고 물어봤지만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그러더니 다시 극장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극장엘 가보고 싶어요.”
나는 어딘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괜찮다고 답했다. 그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최후의 경험이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딱히 기억에 남는 일이 없다던 그였다. 그런 그가 가보고 싶다는 극장이라니, 되도록 함께 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그와 서울에서 버스로 세 시간 가량 떨어진 남쪽 도시로 향하게 되었다. 아무리 되돌아가 보아도 그것은 순전히 극장 때문이었다. 남쪽 도심 한 가운데 있다는 오래된 극장, 겨울엔 난방이 되지 않아 담요를 나눠주고 원두커피를 천 원에 판다는 그 극장. 물론 그 극장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그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복수는 나의 것,은 미성년자 관람불가였지만 몰래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고향이라는 것이 있다면 내게는 바로 그 남쪽 도시였다. 고등학교 때까진 지금과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방학 때마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개 방송을 보기 위해 부모님 몰래 서울행 버스를 탄 것이다.
이제는 서울에서 그 도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것도 극장을 보기 위해.
그는 휴게소에서 산 호두과자를 한 알 입에 넣으며 내게 극장에서 본 최초의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며 그는 이거, 서울에서는 흰색이 들어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 왜, 유명한 영화인데요, 그 제목이, 아 그게 장국영이 나와서 춤을 췄는데요.”
그거라면 알아요. 그가 그렇게 말하며 호두과자 봉지를 내미는 순간 나도 그 영화의 제목이 떠올랐다.
“해피 투게더.”
우리는 동시에 호두과자를 입에 넣고 그 영화의 제목을 우물거렸다.

그 영화는 열셋 무렵 아빠가 보여줬다. 극장은 아니었고 어디서 구했는지 조악한 비디오테이프였다. 반지하에 살았으므로 두꺼운 커튼을 여미지 않아도 되었다.
아빠, 저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거야? 양조위와 장국영을 보며 내가 물었고, 아빠는,
응, 그럼. 하고 답했다.
응, 그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것은.

평일의 텅 빈 버스 안에서 호두과자를 나눠 먹으며 최초의 영화에 대해 떠올리자, 나는 문득 그 도시에 대해 무어라도 이야기 하고 싶어졌다. 우리가 버스를 타고 내리는 커다란 터미널에서 그 도시의 동쪽 끝으로 가면 인근 시골로 가는 작은 터미널이 하나 더 있고, 그 터미널에는 기다란 나무 의자와 탈지분유 맛이 나는 우유 자판기가 하나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그 주변에서 살았다고, 거기가 실상은 도청과 더 가깝고 아빠가 다니던 학교와 가깝고 또 이 극장과 가깝다고. 그래서 나는 종종 시위대를 마주치고 밤새 취한 사람들을 마주쳤고, 매해 5월이 되면 누군가를 찾는 듯한 음악들이 도심을 채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리고 또, 그 극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 극장보다는 조금 덜 오래된 극장이 있었는데 그 덜 오래된 극장에서는 매해 마지막 날 밤새 영화를 틀어두고 버티는 관객에 한해서 소정의 선물을 주기도 했다고 말이다. 수능이 끝났던 2003년 마지막 날엔 나 또한 그 극장에서 밤새 영화를 보는데 도전했고 그해 봤던 영화가 무엇인지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결국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밖으로 나와야 했다고, 이런 이야기들 말이다.
“영화 중간에요?”
그랬다. 나는 그날 영화를 다 보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영화를 좋아하니까 몇 편 이어 보는 건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두 편이 넘어가자 허리가 뻐근해오기 시작했다. 연말 가요프로그램에서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몇 번째로 나왔을지 궁금하기도 했다(그건 팬들 간의 자존심이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였다. 나는 그대로 로비에 앉아 시간을 좀더 흘려보낸 뒤 첫차를 타러 갔다. 도청 앞에선 신년 행사가 있었는지 사람들이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문득 내가 보던 영화가 지나간 해 최후의 영화인 건지, 아니면 그해 최초의 영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밤새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엄마에게 등짝을 몇 대 맞았다. 이제 서울로 가면 이 집엔 절대 안 올 거야! 그러다가 몇 대를 더 맞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땐 정말 서울로만 가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우리 모두 ‘인서울’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그 극장을 찾아보았다. 그곳은 이제는 CGV가 되어있었다. 물론 이제 다른 곳이 되었다고 해서 그 극장이 원래부터 없었던 건 아니지만요, 덧붙이는 나와 고개를 끄덕이는 그.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이제 어딘가를 갈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이 남쪽도시보다 도쿄나 타이베이와 같은 도시를 더 자주 가는 것 같았고 그러므로 이 도시에 대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처음으로 서울을 벗어나 여행을 간 것이었는데.”
거긴 도청이라고 어떤 청년이 알려주었어요, 그는 쪽지 모양으로 접은 호두과자 봉지를 내게 건네왔다. 이것을 빈 호두과자 봉지라고 해야 할지 쪽지라고 해야 할지 조금 망설여졌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는데. 그 일이 그 전 해에 도청을 중심으로 있었더군요, 사람들이 죽어간 그해 5월 말이에요.”
군복 같은 옷을 입은 청년은 도청을 가리키며 극장이라고 말했다. 극장 쪽을 가리키면서는 도청이라고 했다.
모든 걸 다 봤는데 그건 다 거짓말이래요, 텔레비전에서, 그 사람이요.
전 단지 극장을 찾고 있어요,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요. 그가 갸웃하며 다시 말했으나 청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잊으래요.
청년은 곧 그를 통과했지만 시위가 빈번한 시기였으므로 그는 총을 든 진짜 군인들이 혹 청년 옆을 지나갈까 자꾸만 뒤를 돌아 확인해야 했다, 잊으라는 말을 들었다던 청년을.

그날 그는 그 오래된 극장에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이죠? 히로시마. 이렇게 중얼거리는 배우를 담은 스크린은 평평하고 넓었으며 좌석 또한 비좁지 않았다. 고개를 죽 빼거나 어깨를 웅크리지 않아도 됐다. 조선인들은 영화를 좋아했지만 일본의 영화는 절대 보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유럽 영화와 조선 영화를 즐겨봤다고 했다. 그는 조선인들이 자신의 나라 영화도 보았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이죠? 히로시마. 그는 잠시간 더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는 스크린을 등지고 극장을 나섰다. 다시 도청 쪽으로 걸어가면서 그는 우체국 앞에서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반갑게 서로를 향해 인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식당을 지나면서는, 상추튀김 있어요, 라는 말에 잠시 상추를 통째로 기름에 넣는 상상을 했다. 극장에서 도청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대체로 평온하게 살았습니다. 운이 좋아 학교에 남았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았어요. 그 시절 여성이, 저는 백인여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성이 임용을 받는 일을 흔치 않았는데 말이죠. 물론 제 실력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저는 일생동안 제 학문에 충실했거든요. 아시겠지만, 내 나라의 여성노동자들은 2차 세계대전 때 불꽃이 튀는 위험한 공장에 실크 스타킹을 신고 나가 일을 해야 했어요. 누구도 안전을 알려주지 않았죠. 그래도 열심히 일을 해서 포탄을 만들고 배를 띄웠어요. 남성뿐이 아니에요, 여성들은 국가를 위해 헌신했고 아이들을 위해 도시락을 만드는 일도 소홀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그럴 수 없었죠, 새벽부터 공장에 나가야했지만 가정 일을 신경 쓰지 않는 여성이란 여전히 손가락질의 대상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전쟁이 끝난 후 남성들이 돌아오자 일자리를 잃었어요. 여성들은 숙련 노동자였지만 아무도 여성들을 써주지 않았어요. 그러니까…….저는 어떤 제도와 관습, 폭력과 편견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거지요. 분명히 있었던 그런 폭력과 슬픔이요. 그리고, 또 슬픈 일…….이 있다면 딸아이가 작은 교통사고를 당했던 거죠, 다행히 다치지 않았어요. 역시나 전 운이 나쁘지 않았군요. 이렇게 유학했던 나라에도 다시 왔고요. 사실 그동안 이 남쪽 도시에 대해서는 길게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실제 그는 학업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 남쪽 도시에는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그날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하지만 막상 한국에 대해 생각하면 다른 어떤 일보다 그날이 유독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가 모두 기억을 하고 있다고요.”
참 이상한 일이지요, 그는 내게 미소를 보였다. 그것은 어깨를 으쓱하며 지어보였던 이전의 미소와는 조금 다른 게 느껴졌다.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확실히, 확실히 말이에요.”
우리는 그날 극장을 가기 위해 남쪽 도시의 터미널에 내렸다.

* [24분의 1]은 젊은 소설가 24인이 매월 한 명씩 참여하여 24시간을 채우는 짧은 픽션 코너입니다. 참여 소설가들에게 특정한 ‘시간’이 창작 소재로 주어집니다. 2019년 1월에 시작해 2020년 12월에 완성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