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말을 걸어준 노래
먼저, 윤상의 ‘달리기’. 노땐쓰(NODANCE) 1집 앨범에 들어있었지. 지금은 고인이 된 신해철과 윤상이 젊은 시절 의기투합해서 함께 낸 음반. 1996년도였을 거야. 댄스그룹들이 너도나도 샘플링을 기반으로 테크노 음악을 선보이던 시절. 대량복제된 사운드가 모두의 음악 취향을 비슷하게 만들어가던 시대. 대중음악의 질적 하향 평준화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저마다의 흥겨움이 중요했던 시기. 그런데도 노땐쓰는 퍽 오만한 음반이었지. 전자음악=댄스음악, 이라는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겠다니… 따지고 보면, 다양성이 없는 시장구조의 문제였던 거지, 저마다 제가 좋아 즐기던 리스너들의 음악 취향은 문제가 없었을 텐데. 하지만 기억나. 댄스음악으로 넘쳐나던 한국 대중음악계는 썩었고 너무 유치해서 들어줄 수 없다던 ‘나’의 모습. 몇몇 작가주의 음반과 엘리트 뮤지션만 선별해서 들었던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유별난 태도. 그래서 ‘나’ 는 노땐쓰를 들었지. 윤상과 신해철의 대의에 공감하면서.
‘달리기’는 제일 마지막 트랙이었을 거야. 사실은 좀 당황스럽기는 했어. 노땐쓰의 음악들이 살짝 어려웠고 재미가 없었거든. 꽤 난이도 있는 음악들도 제법 잘 들었던 나지만 리스너로서 나 자신에게 의문이 들었어. 웃기지? 음반을 의심하기보단 청자인 스스로를 탓하던 특이한 시절이었으니까. 근데, 마지막 트랙에 있던 ‘달리기’는 갑자기 너무 쉬운 거야. 쉽다기보다는 테마가 너무 분명했지. 그리고 노골적이었어. 당시에는 서태지도 넥스트도 듀스도 공일오비도 함께 있던 시절이라, 강력한 한방의 충격이 익숙한 시절이었는데도… 윤상의 노래는 잔잔한 충격이었지. 충격의 층위도 다양했을 거야. 무엇보다 음악의 템포가 느렸어. 기존의 댄스음악보다 더 파괴력 있고 속도감 있는 사운드를 보여준 두 번째 트랙 ‘질주’ 와는 확연히 다른, 완만한 속도의 ‘달리기’ 였지. 또 하나의 놀람은 가사에서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는 점. (작사를 한 사람은 윤상의 오랜 파트너인 박창학이었지.)
그 전까지 뮤지션은 선구적인 세계를 개척한 천재이거나, 나보다 먼저 어떤 사건 혹은 감성을 경험한 선배이거나, 나를 이끌어주는 리더였기에, 그들의 일방적인 선언을 그대로 수긍하는 편이었는데… 뭐랄까, 그런데 너의 생각은 어떠니? 하고 질문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이 노래를 듣다가 대답을 하는 습관이 생기기도 했지. 지겨운가요? 네. 힘든가요? 네. 숨이 턱까지 찼나요? 네…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버린 것을. 그렇군요.
다음으로, S.E.S의 ‘달리기’. 그들의 마지막 정규앨범 5집에 수록된 리메이크곡이었어. 전자음악이 댄스음악이 아니라고 외쳤던, 신해철과 윤상의 호기로운 외침과는 다르게, ‘달리기’든 전자음악이든 댄스음악이든 뭐든 어때, 하며 아이돌의 선배 곡 리메이크 전통에 첫발을 내디뎠던 곡. 아마도 윤상 팬들과 S.E.S 팬들이 서로 갈리지 않았을까? “너네가 감히!”라는 말과 “이게 뭐가 어때서!”라는 말이 오갔을 거야. 아이돌에 대한 편견과 무지와 혐오가 아직은 남아있던 시절이었으니까. 평소의 나였다면, 윤상도 원치 않을, “너네가 감히”를 외쳤겠지만, 군인이었던 나는 그들의 노랫말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 심지어 이런 가사가 있었으니까.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거.
S.E.S의 노래는 원곡의 미디 템포와는 다르게 살짝 빨라져. 생각보다 편곡도 괜찮았지. 염세적이고 허무함이 짙게 배어있는 윤상 스타일의 세기말 전자음악과는 다른, 발랄하지만 과하지 않은 세기초 전자음악. 뿅뿅거리고 샥샥거리는 이펙트 또한 적당했지. 살짝 음정의 키가 올라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음으로 승부하는 노래. 보컬의 가창력보다는 메시지에 좀 더 집중하게 되는 특이한 곡이야. SES의 바다는 늘 고음을 질러왔는데, 이 곡에서는 크게 기교나 욕심을 부리지 않지. 윤상의 노래에서는 달리는 것의 지겨움이나 그 이후의 휴식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면, S.E.S의 노래에서는 힘내라 파이팅! 하는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졌어. 아마도 걸그룹이 부르는, 괜찮아 잘될 거야―류의 노래의 시초가 아닐까 해.
마지막은, 옥상달빛의 ‘달리기’. 나는 늘 의문이 있었어. 윤상은 왜 이런 곡을 썼을까. S.E.S는 왜 이 곡을 다시 불렀을까. 그런데 옥상달빛의 ‘달리기’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가수를 찾아 떠돌던 노래가 오랜만에 적임자를 만났구나. 이 곡은 2015년에 발매된 리메이크 프로젝트 ‘리태그(RE:TAG)’의 첫 번째 트랙의 곡이었어. 돌이켜보면 암울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지.
앞선 두 버전이 ‘전자음악’ 에 충실했다면, 옥상달빛은 ‘어쿠스틱’ 한 음악적 해석으로 이어받지. 키보드와 바이올린, 기타와 소규모의 리듬악기들. 힘든 청춘들에게 위로를 보내왔던 옥상달빛의 기조 그대로 이 노래는 이렇게 들려왔어. “괜찮아, 어차피 잘 안 될 거니까 조금만 더 힘내고, 다 끝나고는 좀 쉬자”
재미있게도, 옥상달빛은 원곡 가사의 후렴구를 살리지 않아. “It`s good enough for me. bye bye bye bye~” 하면서 막판에 꼭 누군가를 떠나보내려는 계획은 리메이크곡에선 실현되지 않지. 원곡을 들을 때부터 늘 궁금했던 것이 있었어.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잘 가라~”고 전했던 상대는 누구였을까? 윤상의 입장에선 (당시 공동작업에서 자기 말을 그렇게 안 들었다던) 신해철이었을까? 아님 전자음악을 왜곡했던 댄스음악가들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20세기의 사람들이었을까. 그렇다면 S.E.S의 입장에선 누구였을까? 팬들이었을까? 아님 아이돌을 도구로만 생각했던 업자들이었을까? 해체를 앞두고 있던 멤버들이었을까. 그 후렴구는 콕 짚어 나에게 말을 걸던 가수들이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들을 흉보듯 슬쩍 흘려보내는 딴청처럼 여겨졌지.
옥상달빛의 ‘달리기’는 오로지 듣고 있는 ‘나’ 에게만 집중하는 것 같아. 평소보다 더 담담하게 성심성의껏 물어봐 준다는 느낌이랄까. 지겨운가요? 응. 힘든가요? 응. 이유도 없이 눈물 나게 억울하겠죠. 이미 울고 있어. 일등 아닌 보통들에겐 박수조차 남의 일인걸. 맞아. 윤상과 SES가 불렀을 때는 그다지 와 닿지 않았던 ‘보통들’과 ‘박수’의 의미가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오지. 옥상달빛에게 더욱 친근함과 만만함을 느껴서일까. 내 부서진 감정을 번역해내기 위해 애쓰는 그들에게서 뭔가 감동 받게 되지. 물론, 최근에 내가 가장 ‘들리는’ 부분은,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걸’ 이야. 휴식이 정말로 내게 주어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 이젠 셋 중에 하나를 골라야겠지. 물론, ‘달리기’를 부른 뮤지션은 더 있어. 앞으로도 많아질 거라고 생각해. 2020년대에는 또 어떤 시대적 감수성으로 해석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당신의 노래는 무엇인가요?”에 대한 답을 누구로 내릴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고등학생과 군인과 마흔의 한국 남자에게, 누가 부른 곡이 가장 나의 노래였을까. 아무래도 ‘지금, 여기’를 버티며 살아가야 하기에. 더하여 마흔의 나에겐 더 이상 작별인사를 하면서 떠나보낼 누군가가 없는 게 나을 테니, 내 인생의 노래는. 옥상달빛의 ‘달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