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는 다른 삶을 꿈꿨다. 새 인생, 뉴 라이프. 그것은 은수가 스무 살 이후로 꾸준히 바라온 목표였다. 목표였으니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날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던 은수는 삼 년 가까이 다니던 광고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어떤 조짐이나 낌새가 없었으므로 그녀의 퇴사 소식에 선배와 동료 들은 하나같이 당혹감을 드러냈다. 출퇴근이 지겨워서 때려치운다고, 한순간도 회사가 좋았던 적 없었다는 은수의 말에 다들 공감은 하면서도 어째서 그런 식으로 살까, 그래도 되나, 하는 의문은 좀처럼 떨쳐내지 못한 것이다.
후회할 거야. 그녀를 만류하던 임과장은 은근히 겁을 주는 어조로 말했다. 아직 젊으니까 제멋대로 구는 건 좋다 이거야. 그래도 말이지. 최소한 다음 스텝은 계획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막 나가. 잠자코 듣던 은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요. 저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상사를 향해 나긋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럼 뭐, 이제 어떻게 할까요. 살살 나가요?
퇴사 후 은수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늦잠을 자고 종일 텔레비전을 보고 배달 음식만 시켜 먹으며 게으름을 피웠다. 그 짓도 지겨워질 무렵에는 통장 잔고를 털어 해외여행을 떠났다. 필리핀의 마닐라, 중국의 상하이,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두 달여간 돌아다녔다. 그러한 궤적에 어떤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고, 은수는 그때그때 느낌이 가는 대로, 현지 공항에서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티켓을 끊어 떠났다. 눈에 띄는 호텔에 들어가 짐 가방을 풀었고, 이름 모를 음식들로 끼니를 해결했으며, 옷은 세탁하기 귀찮다는 핑계로 내버리고 새로 사 입길 반복했다.
왜 이렇게 막 나가.
그때마다 은수는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임과장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사직을 결심할 때만 해도 이렇게 막 나갈 생각은 없었는데, 점점 막 나가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구백칠십팔만원을 탕진하고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밑천이 거덜났으니 깨갱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완전 거지가 됐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동전 지갑까지 탈탈 털어 한국행 비행기 표를 손에 쥔 은수는 불현듯 홀가분함을 느꼈다. 거지. 승객 대부분이 안대를 착용한 채 잠든 기내 안에서 그녀는 좀체 눈을 붙이지 못하고 창밖만 내다보았다. 거대한 적운 위로 드리워진 석양빛을 따라 어떤 뜨거운 감정이 제 안으로 흘러드는 것을 느꼈다. 거지. 그것이 자신의 새로운 이름 같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은수는 살갗이 검게 그을렸고 몸무게가 사 킬로그램가량 줄었으며 뭐랄까 인내심을 상실했다. 원래도 버티고 견디는 마음이랄까 너그러운 품성이 변변치 않은 편이었는데, 그 얼마 되지 않는 참을성마저 빵 부스러기처럼 잘게 찢어 해외 곳곳에 뿌리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처음으로 눈치챈 건 그녀의 오랜 남자친구인 정우였다.
미쳤나봐. 은수는 공항 출입구를 빠져나오자마자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넣으며 말했다.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추워. 뭔데 시베리아보다 춥고 난리야.
이 정도 가지고 뭘. 마중 나온 정우는 그녀의 캐리어를 대신 끌어주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춥다 춥다 하면 정말로 춥기만 한 법이야. 그냥 좀 많이 시원하구나, 라고 생각해봐. 초겨울치고 지나치게 시원하다고.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 포근한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니야. 은수는 그의 옆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런데 너는 작년이 기억나? 작년 이맘때 얼마만큼 추웠는지가 어떻게 기억나?
기억나. 정우는 바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낸 다음 제 이마 위로 들어올려 버튼을 눌렀다. 야외주차장에 빼곡하게 늘어선 승용차 가운데 하나가 이내 헤드라이트를 깜빡이며 경적을 울렸다. 작년 겨울에 재밌는 일 많았는데. 우리 같이 부산에 놀러 갔잖아. 송도에서 케이블카 타고, 밤에 불꽃놀이도 하고. 마지막 날에는 용궁사에 들러서 부처님한테 절하고 소원 빌었던 거,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 은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부처님한테 소원을 빌었다고? 나 모태 신앙인 거 알잖아.
정우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괜찮아. 내가 기억하니까. 그때 네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가 하면……
야, 됐어. 은수는 그의 등을 탁 소리나게 쳤다. 몰라도 되니까 입도 벙긋하지 마. 말하면 소원 안 이뤄지는 거 몰라?
둘은 앞 범퍼가 살짝 찌그러진 검은색 승용차에 올라탔다. 정우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켠 뒤 히터부터 작동시켰다. 내비게이션의 전원 버튼을 눌렀고 검색창이 뜨자 은수의 한남동 집 주소를 차례로 입력했다. 그사이 은수는 오랜 습관대로 안전벨트부터 착용했다. 등받이를 젖혀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기대앉은 다음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는 남자친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으니 몸이 노곤해지면서 시야가 아득하게 흐려졌다. 은수는 깜박 잠이 들었다가 눈을 부릅뜨며 깨어났다. 그 순간 제 몸에서 무엇인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삼만이천 피트의 상공 위에서 자신을 단단히 휘감았던 충만감이 한순간에 느슨해지며 휘발되어가는 감촉이었다.
은수는 오후 반차까지 내가며 자신을 마중 나온 남자친구의 귀 뒤를 바라보면서, 그가 스크린 속 자판을 클릭할 때마다 점점 명확해지는 둘의 도착지를 올려다보면서 난처함을 느꼈다. 돌고 돌아 원점이구나. 그녀는 자신이 이 안락하고 견고한 세계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난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막 나가긴 개뿔.
영종대교 위를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은수는 조용히 오른손을 말아 쥐었다. 살얼음이 낀 강물을 건너다보다가 버튼을 눌러 차창을 끝까지 내렸다.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댔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매서운 강바람이 차내로 쏟아지듯 밀려들어왔다. 뭐하는 거야, 위험하게. 정우가 손을 뻗어가며 만류하자 그녀는 남자친구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시원하네. 그렇게 말하는 은수의 코끝과 눈두덩은 추위로 벌게져 있었다. 시원하다고 생각하니까 정말로 시원한 거 같네.
정우는 그런 은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운전대를 고쳐 쥐었고 제 앞에 펼쳐진 도로를 멀거니 응시했다.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 은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데, 위로를 건네고 싶은데,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작년 겨울에 자신이 용궁사에서 빌었던 소원을 떠올렸다. 간절한 마음에, 여자친구에게조차 털어놓지 않았던 소원. 은수가 더이상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해주세요.
오래지 않아 그녀는 창문을 올려 닫았다. 히터에 다가앉아 언 몸을 녹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옷깃을 매만졌다. 그러더니 배고프다, 저녁 먹고 들어갈까, 나 돈 없는데, 라고 한숨 쉬듯 말했다. 정우는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핸들을 천천히 돌렸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르자고, 그녀가 좋아하는 비프스튜를 만들어주겠다고 대답했다. 올겨울에는 부모님이 계신 거제도에 가자고, 거기 몽돌해수욕장에서 소원 풍등을 띄우자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