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배드 지니어스>(2017)와 <이중배상>(1944)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타우트 푼프리야 감독의 <배드 지니어스>는 장르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걸 망설이게 만드는 영화다. 고등학생 여러 명이 모여 완벽한 컨닝 계획을 세운다는 점에서는 호쾌한 하이틴 케이퍼 무비이고, 정교하게 설계한 계획에 차질이 생길 때마다 심장이 아플 만큼 긴장되는 걸 보면 잘 짜여진 스릴러 영화인 건 분명하다. 그런데 끝까지 다 보고 나면, 잘 짜여진 장르의 쾌감보다는 애처로운 눈빛의 린(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과 쓰레기더미 위에서 울부짖는 뱅크(차논 산티네톤쿤)의 절박함이 자꾸만 기억에 남는다. 린과 뱅크가 잔뜩 상처 입은 마음을 안은 채 호주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길의 어둑함, 두 사람이 제공한 답안으로 STIC 시험 고득점에 성공한 부잣집 학생들이 웃고 떠들며 파티를 즐기던 순간의 황량함이 얼룩처럼 남은 자리에 서서, 나는 이 작품의 장르를 뭐라 정의하면 좋을지 오래 고민했다.

결국 직접 범죄를 고백하는 주인공 린을 보며, 나는 뜬금없이 빌리 와일더 감독의 <이중배상>을 떠올렸다. 린이 처음엔 친구 그레이스(에이샤 호수완)를 돕고 싶다는 호의로 부정행위를 시작한 것처럼, 보험 외판원 월터(프레드 맥머레이) 역시 처음엔 그저 남편에게 정서적으로 학대 당한다는 필리스(바바라 스탠윅)를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선 길이었다. 그러나 필리스의 남편인 석유재벌 디트리히슨(톰 파워스)을 죽이고 사고사로 가장하는 데 성공한 이후, 월터는 고대하던 행복과는 점점 거리가 먼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사랑을 속삭이고 자신의 불행을 호소하던 필리스에게 그 의도를 의심할 만한 과거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계획은 다시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한 빈 틈으로 가득하다. 선의를 가지고 사건을 수사하는 동료 보험조사관 케이스(에드워드 G. 로빈슨)는 범인이 월터인 줄도 모른 채 끊임없이 월터의 숨통을 조이며 말한다. “공범이 있으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두 사람 모두 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혼자서는 열차에서 내릴 수 없다고.”

린은 제가 내린 선택으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범죄를 획책한 친구들을 죄다 고발해야 했을 테고, 당연히 두 번 다시는 STIC을 보지도, 더 넓은 세계로 나갈 기회를 얻지도 못할 것이다. 돌아가 의지할 친구 같은 게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린이 고백을 결심한 이유는 하나였으리라. 린은 선량하던 친구 뱅크가 자신 때문에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혼자서 열차에서 내릴 수 없”음을 상기시키며 자신을 협박하는 지경에 이른 것을 보았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성공하는 게 린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마지막 순간 사무실로 돌아와 녹음기를 켜고 제 죄상을 고백하는 월터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머리를 굴려 니노(브라이언 바)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랬다간 죄 없는 롤라(진 헤더)는 부모를 모두 잃고 남자친구까지 잃은 세상에 혼자 버려질 것이다. 호의로 출발했던 길이, 어느덧 외발자전거를 탄 채 외줄 위에 오른 곡예사처럼 끊임없이 페달을 밟지 않으면 추락할 수밖에 없는 죄악의 길이 되고야 만 상황. <배드 지니어스>의 린과 <이중배상>의 월터 모두 제 죄의 무게에 질려 스스로 외발자전거에서 뛰어내렸다.

물론 두 작품의 결말은 그 톤이 사뭇 다르다. 필름 느와르의 조상 뻘인 <이중배상>이 빛도 구원도 없는 월터의 완벽한 몰락으로 끝나는 동안, <배드 지니어스>는 햇볕이 쨍한 사무실 안에서 용기를 내어 죄를 고백하는 린의 모습으로 끝나니까. 그러나 내겐 <배드 지니어스>의 결말이 더 잔인하게 느껴진다. 안정된 생활을 정념 때문에 제 발로 걷어찬 건 온전히 월터의 잘못이었지만, 린을 더 깊은 부정행위에 동참하게 만든 빈부격차는 린의 잘못이 아니었다. 월터는 사형으로 죄값을 치를 일만 남았지만, 린에게는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너무 길다. 어쩌면 <배드 지니어스>는 필름 느와르가 아니었을까. 결국 누구도 행복해지지도 구원을 얻지도 못한 채 모두가 지옥 속에서 살아야 하는, 아주 지독한 결말의 필름 느와르.

<이중배상>(1944)
Double Indemnity
감독 빌리 와일더
주연 프레드 맥머레이, 바바라 스탠윅, 에드워드 G. 로빈슨
시놉시스
보험회사 직원인 월터 네프는 디트리히슨이라는 남자의 자동차 보험을 갱신하러 그의 집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그는 디트리히슨의 매력적인 아내 필리스를 만나고 남편을 살해할 음모를 품고 있는 그녀의 유혹에 넘어간다. 월터와 필리스는 디트리히슨에게 자동차 보험을 갱신하는 것처럼 속이고 사고 보험에 들게 한다. 일반적인 자동차 사고가 아니라 기차 사고일 경우에는 보험금이 두 배로 지급된다는 걸 알고 있는 월터는 디트리히슨이 기차로 여행을 떠나는 날 그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디트리히슨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여행은 연기되고 필리스는 안절부절못해 하지만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