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_hannam_201710

간혹 내가 복무하는 이 세계가 한 점 그림이라면 어떨까, 생각할 때가 있다. 주로 갤러리를 걸으면서 콧노래 대신 흥얼거리는 상상이다. 북런던 햄스테드 히스 인근의 한 갤러리에서 근무할 당시 수석 큐레이터―내가 존경하는 유일한 업계 선배였다―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00호에 달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갤러리를 찾아서searching for gallery>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화랑이 담긴 유화 작품을 전시할 때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게 있네. 자정이 되면 그림 속 인물이 화폭에서 빠져나와 다른 그림을 살펴보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그중에는 다소곳한 관람객도 있지만 고집 센 비평가도 섞여 있지. 오래전 일이야. 자정이 막 지날 무렵, 기획전시실에 불이 켜져 있다는 관장의 전화를 받았어. 커튼 뒤로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는 말도 덧붙이더군. 관장은 갤러리의 창문을 여닫는 일조차 직접 하는 법이 없었으니 전화 자체는 새로울 게 없었지. 그런데, 그날은 예감이 좋지 않았어. 왜 그런 날 있지 않나. 종일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았나. 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내 손으로 스위치를 올린 뒤에 내리지 않은 전등불 하나가 어딘가에 켜져 있지 않나…… 아마도 그날 관장의 목소리에 유별난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야.

사무동에서 이곳 전시실까지 헐레벌떡 뛰어갔어. 몇 달간 준비했던 <빛과 어둠light and dark> 런던전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을 무렵이니 내 심정이 어땠겠나. 비슷한 시기 근처 갤러리에서 렘브란트의 초기 초상화 두 점을 도둑맞았다는 소식도 들었으니 노심초사했지. 보험금을 노린 관장 노인네의 자작극이란 이야기와 함께 말이야. 어쨌든 기획전시실에는 정말 사람이 있었어. 검정 턱시도를 빼입고 중산모를 쓴 남자가 팔짱을 끼고 느릿느릿 그림을 살펴보고 있더군. 내 쪽에선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어. 내가 저만치서 소리치며 다가가자 남자는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반대편으로 줄행랑쳤지. 처음엔 착각인가 했어. 전시실 끝에 다다를수록 남자의 모습이 희미해지더군. 그러다가 막다른 코너에서 멈춰 섰네. 그 앞에 이 그림이 있었지. 남자는 이 앞까지 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야.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관장이 묻더군. 도둑맞거나 상한 그림이 없느냐고 말이야. 그렇다고 하니까 관장이 슬며시 웃더군. 이 그림에 얽힌 사연을 모르느냐면서 말이지. <갤러리를 찾아서> 속 중산모를 쓴 남자는 세계 곳곳의 갤러리라면 안 다녀본 곳이 없는 만큼 그림에도 조예가 깊다는 거야. 형편없는 그림에는 기필코 얄궂은 장난을 부리는데 그 섬세한 손길을 피해갔으니 이번 전시는 성공할 모양이라고.”

그런 그림 속 인물이라면 제법 아름답지 않으냐고 내가 묻자, 선배는 얼굴을 붉히며 이 이야기의 교훈은 그딴 게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본 게 정말 저 그림 속 남자였을까? 그 일이 있고 난 뒤 관장은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어 날 해고했지. 유감이지만, 한동안 내 삶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네.” 그는 몇 년간 지방법원을 들락거린 뒤에야 큐레이터로 복직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기이한 밤의 추격전이 그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은 듯싶었다.

불현듯 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가 떠오른 건 <빛과 어둠> 서울전을 앞두고 철야 근무가 계속되던 날 밤이었다. 한남동 이태원로에 있는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긴 지 사 년을 꽉 채워갈 무렵이었다. 큐레이터로서 썩 괜찮은 커리어를 쌓고 있었으나 기업체 산하 갤러리에서 정규직 타이틀을 따기 위해서는 모기업 직원들만큼이나 통과해야 할 관문이 많았다. 정규직 전환의 기회를 주는 것도 사 년 차가 막바지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던 터라 나는 격무를 자처했다. 당시 내가 넘어야 할 관문 중 하나가 <빛과 어둠> 전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이었다. 난관은 외부에도 존재했다. 모기업의 비자금 사건과 연루되어 고가의 미술품 구입을 문제삼으면서, 갤러리 외관이 뉴스에 연일 보도되었다. 더군다나 미술관의 다른 소장품까지 언급되었고 이 때문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전시 외 일로 언론 매체에 우리 관이 언급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공지에 더하여 ‘현대미술의 의의는 현재가 아니라 후대에 있으니 연연하지 말고 각자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라’는 관장의 메시지가 조사를 바꿔가며 주기적으로 게시되던 시기였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자정까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동료들은 막차 시간을 핑계로 순번이라도 정해놓은 듯 하나둘 퇴근했고 나는 혼자 남아 서류 작업에 여념 없었다. 새벽 한시에 이뤄지는 전시장 순찰까지 자처한 터였다. 십 분 전 서류 작업이 끝나, 퇴근 준비를 마친 뒤 손전등을 챙겨들고 일층 전시장으로 향했다.

센서 등이 번쩍인 건 일층 전시장을 절반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불빛은 2층 복도에서 새어 나왔다. 나는 서둘러 계단을 올랐고 그곳, 이층 기획전시장 입구에서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검정 양복을 갖춰 입은 채로 연두색 사과를 먹고 있었다. 사과를 한입 베어 문 남자는 나를 발견하고는 뒷걸음치더니 이내 전시장 끝을 향해 내달렸다. 그가 화랑을 지날 때마다 주홍색 센서 등이 환하게 밝아졌다. 저 불빛을 당장 멈춰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였다. 얼굴이 주홍색으로 달아오르던 선배가 떠올랐다. 회한에 잠긴 표정도 함께였다. 그 색과 표정만큼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연했다. 나는 기필코 저놈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일종의 복수라고 믿었던 것 같다. 창가 옆 벽면에 기대어 있던 접이식 철제의자를 집어들고 힘껏 던졌다. 의자는 날카로운 직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남자의 스텝을 무너뜨렸다. 놈은 균형을 잃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가가보니 정신을 잃은 채로 엎어져 있었다.

“미술관인데요. 여기, 도둑놈이요. 빨리요. 빨리 와주세요. 여기가 어디냐면 한남동 이태원로……” 나는 숨을 몰아쉬며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경찰차 뒷좌석에 실려 한남파출소에 도착한 뒤에야 남자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몇 가지 지명과 이름을 댔지만 억양이 독특한 영어 발음으로는 그의 신원을 증명할 수 없었다. 신분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도, 경찰도 난감한 표정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경찰은 그가 불법체류자일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나죠?” 경찰은 그의 몸에서 이상한 악취도 난다고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떠들어대는 건 흔한 수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 것 같네요.” 나는 경찰의 말에 일부 동의했지만, 그 냄새가 미술관 복원실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화학제품―바니쉬와 시아노아크릴레이트 계열의 접착제―냄새와 비슷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대신 명함을 건네며 신원이 확인되면 관이 아닌 개인 번호로 연락을 달라고 당부했다. 관이 안팎으로 시끄러운 때에 협조 좀 부탁드린다는 말에 경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택시를 타고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동트기 전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이층 전시장을 정리해나갔다. 조각난 손전등 부품을 찾아 치웠고 접이식 의자는 원래 위치에 세워두었다. 그림을 훔치러 온 악질 산업스파이를 미술관 직원이 때려잡았다는 미담 정도라면 홍보에 나쁘진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지만, 관장을 비롯해 그 누구에게도 간밤 일은 밝히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끔히 치워진 통로 끝에 서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내일부터 공개될 그림을 한 점 한 점 뜯어봤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내에선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이 대다수였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갤러리를 찾아서>로 말할 거 같으면, 작가의 말년 화풍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화랑에 선 남자가…… 남자가, 사라졌다. 나는 그림 앞에서 여러 번 눈두덩을 문질렀다. 중산모 쓴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자리가 정교하게 뜯겨나가 있었던 것이다. 캔버스에는 회백색 얼룩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는 여러 각도에서 그림을 관찰했다. 관찰 끝에 발견한 것이라곤 화폭 아래 떨어진 검은색 중산모뿐이었다. 새것처럼 날이 선 중산모는 길을 잃은 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중산모를 들여다보며 지난달부터 출근한 복원실 수습 직원에게 전화했다. 여러 번 신호가 울렸으나 받지 않았다. 신호가 울리는 동안 그 모자를 써보았다. 머리에 꼭 들어맞았다. 중산모에 퍽 어울릴 만한 옷이 떠올랐다. 사무실 옷장에 걸려 있는 직원용 유니폼. 검정과 감색이 적절히 배합된 정장이었다. 그 옷이라면 감쪽같으리라는 걸 알았다. 간혹 내가 복무하는 이 세계가 한 점 그림이라면 어떨까, 상상할 때도 있었다. 그림 속 인물의 생애라면 이보단 아름답지 않을까. 나는 모양이 변형되지 않도록 중산모를 두 손으로 고이 받쳐들고 사무실 쪽으로 걸으며 빛과 어둠에 관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