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 누군가는 알고 누군가는 모르는 쾌감의 정수
아, 이 아저씨도 나와 같은 스타일로 스트레스를 푸시네? 하고 무심코 집었다가 차례를 훑어보며, 아 여행 책인가, 하고 문득 덮었다가 아무렇게나 그려진 듯 하지만, 표지의 욕탕에서 무아지경을 느끼는 한 아재의 표정이 너무나 리얼해 서점에서 데려온 책이다. 그런데 무료할 때 문득 집어 읽어보니 마치 입이 심심한 어느 오후에 집어먹는 바삭한 새우깡 몇 개처럼 그토록 쏠쏠하게 맛날 수가 없는 거였다.
일본인의 목욕 사랑은 일본의 온천 문화, 혼탕, 온천이 딸린 말쑥한 료칸 등으로 그저 그렇겠거니, 하고 짐작만 해온 내게 이 책 <낮의 목욕탕과 술>의 저자 구스미 마사유키는 내가 상상하던 그 이상의 일본인의 목욕 사랑, 또 목욕 문화의 극치를 그의 섬세한 오감을 통해 너무나 재미나게 풀어낸다. 저자는 다니구치 지로와 <고독한 미식가>를 공동 작업한 에세이스트이자 만화가, 디자이너와 뮤지션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인이다. 표지를 포함해 본문에 적절하게 삽입된 그의 캐주얼한 그림은 간장에 적당량으로 풀어진 와사비처럼 읽는 맛을 더해준다.
책은 하마다야마의 하마탕, 기타센주의 다이코쿠탕, 미타카의 치요노탕 등 총 열 군데 지역의 특색 있는 목욕탕과, 또 목욕 후 근방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즐길 수 있는 열 군데의 음식점을 소개하고 있다. 비교적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직업 덕분에 저녁이 아닌, 한낮에 목욕하고 맥주를 즐긴다는 점도 특이하다. 물론 당장 저자가 소개하는 목욕탕과 선술집에 달려갈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에세이의 소박하고 쏠쏠한 읽는 재미와 더불어 캐주얼한 여행서로의 장점도 두루 갖추고 있다.
나도 평소 대중목욕탕을 즐겨 이용한다. 그런데 목욕탕, 을 간다는 행위는 단지 묵은 각질을 벗겨내고, 뜨끈한 욕탕에서 피로를 푸는 것 이상이라는 생각을 종종 해왔다. 어쩌면 인간의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극도의 쾌감과 짜릿함, 일상에서 나를 짓누르던 잡다한 생각들과 번뇌를 그 뜨거운 욕탕에 녹이고, 훈김과 함께 날려버리고 새로 태어나는듯한 그 철학적 가뿐함을 제공하는 곳, 이 바로 목욕탕이다. 그런데 이런 복합적인 심경을 저자는 기가 막히게, 마치 내 마음처럼 그려내고 있다. 직접 만나 본 적도 없는 한 일본 아재의 목욕탕 이야기에 한국의 한 과년한 처자가 비죽비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묘미는 한 가지 더 있다. 그 목욕의 쾌감과 함께 김밥의 단무지처럼(충무 김밥은 제외), 찐빵의 앙꼬처럼 영원불변한 파트너인, 목욕 직후에 맥주 한 잔의 목 넘김, 에 대해서도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
아, 맛있어. 나는 지금 온몸으로 맥주를 받아들이고 영혼을 다 바쳐서 받아들인다. 사랑, 그런 느낌이다 -28쪽-
뜨거운 땀을 배출한 후에 받아들이는 그 신선한 거품이 가득한 맥주와의 혼연일체! 요즘 와서야 혼밥, 혼술이 외롭거나 쓸쓸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충만케 하는 엄연한 문화라는 것이 한국사회에 텍스트로, 방송으로 널리 알려지는 요즘, 이 책의 저자는 이미 진즉 혼술의 대가가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목욕탕은 단연 긴자의 곤파루탕이다. 굉장히 평범한 목욕탕이지만 주방장, 요리사, 바텐더, 호스트 등 전문직 남성들이 주요 고객인 그곳에서 벌거벗은 남성들이 신체 특성으로 직업을 가름하는 저자의 시선이 꽤 흥미롭다. 손가락이 하얀 남성은 요리사, 머리가 빠글빠글하고 작은 체구의 노인은 어쩌면 마작 클럽 주인, 한낮에 긴자의 목욕탕에 오는 남성들을 세심히 관찰하며 직업을 추측해보는 점이 여탕에서 가끔 여성들의 피부와 체형 등을 스캔하며 직업이 무엇일까 간혹 궁금해하던 내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정신은 몸을 따라간다고 한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사는 직장인의 몸이 성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내어 운동을 하고, 피티 수업을 받고, 마사지를 받거나 혹은 산책이라도 하며 몸을 가꾼다. 그런데 땀 흘려 운동을 하는 것 외에 몸에서 묵은 땀과 번뇌를 덜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목욕일지니, 널찍한 탕이 있는 대중목욕탕을 한번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목욕 문화가 없는 몽골에서 6개월을 지내다 돌아온 저자의 지인은 6개월 만에 목욕을 하면서 섹스보다도 그 우위에 있는 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 쾌감은 아마 목욕의 정수를 아는 사람들이면 모두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이다. 개인 욕실에서 매일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거나, 개인 욕조에 몸을 담그는 방법도 물론 있지만, 입수하자마자 헉, 하는 소리가 나오는 대중목욕탕의 그 뜨겁고 널찍한 욕탕에 몸을 담가본 사람들만이 아는 그 지독한 쾌감의 정수를 모두들 한번 느껴보길 바란다.
지은이 구스미 마사유키
옮긴이 양억관
출간 정보 지식여행 / 2016-07
<낮의 목욕탕과 술>은 국내 독자에게는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로 알려진 구스미 마사유키 특유의 ‘맛깔나는 문장’이 담긴 에세이이다. 시대의 변화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목욕탕과 눈물과 웃음 속에서 사랑받아 온 낡은 술집, 그리고 도쿄와 훗카이도에 자리한 목욕탕의 이야기를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전한다. ‘목욕탕’과 ‘낮술’의 절묘한 조합은, 저 깊은 곳에서부터 맥주를 마시고 싶은 기분을 한껏 끌어올린다. 그 생생한 감정은 책 속에서 이렇게 묘사된다. “나는 지금, 온몸으로 맥주를 받아들이고 영혼을 다 바쳐서 맞아들인다. 사랑, 그런 느낌이다.” 한낮, 평범한 일상에 쫓기는 사람들에게는 어쩐지 미지의 세계와도 같은 목욕탕의 풍경! 우리가 모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을까?
유쾌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때로는 짐짓 시치미를 떼면서도 솔직담백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까닭에 팔랑팔랑 막힘없이 페이지가 넘어간다. 꿀꺽 침을 삼키며 책장을 덮고 나면 독자들은 당장에라도 근처 목욕탕에 달려가고 싶어질 것이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부어 넣고 싶어질 것이다. 아니, 어쩌면 구스미 마사유키의 정겨우면서도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문장에 반해 다시 한 번 책을 들춰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여름날, 이 에세이와 함께 한낮의 달콤한 휴식에 잠겨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