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가족만큼 망치기 쉬운 관계도 드물다.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우린 가끔 상대의 의사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 삶에 무단으로 침입하고, 의도를 넘겨짚고, 혼자 실망하고 상처받았다 믿으며 상대를 상처 입힌다. 가족끼리인데 뭐 어때. 가장 가깝기에 가장 잔인할 수 있는 관계들. 이혼 후 그렇게 왕래가 잦지 않았던 아버지 빈프리드(피터 시모니셰크)가 연락도 없이 자신이 일하고 있는 루마니아까지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했을 때, 이네스(산드라 휠러)가 느꼈을 당혹감과 분노도 아마 비슷한 맥락이었으리라. 당장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이 코앞에 있고, 남자 직원들은 호시탐탐 내가 차린 밥상에 수저를 올리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으며, 클라이언트는 제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골치 아픈 인력 감축을 떠미는 마당에, 우스꽝스러운 틀니를 끼고 등장해서는 뭐가 어째요? 인생의 의미요? 아버지면 이렇게 예고도 없이 인생에 막 끼어들어도 됩니까? 상영시간 내내 온몸으로 부르짖는 이네스의 비명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래도 <토니 에드만>의 빈프리드가 저지르는 기행은 선의로 시작한 일이기라도 하지. <로얄 테넌바움>의 로얄(진 해크먼)은 가족을 배반하고 훌쩍 떠났다가 무일푼이 되어서야 시한부 위암 환자라는 거짓말을 앞세워 집에 돌아와 억지로 자식들을 불러 모은다. 지난 수십 년의 불화와 배반으로 뿔뿔이 흩어져 폐인이 되어 살고 있는 자식들에겐 왕년의 천재 소녀 소년의 모습 따위는 없다. 그 속도 모르는 로얄은 아이들에게 묻는다. “너, 예전엔 안 이랬잖아?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된 거야?” 당연히 자식들의 속은 타들어 간다. 내가 입양된 아이라는 걸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잖아요. 내가 세운 투자회사의 돈을 아버지가 횡령했잖아요. 아버지는 비행기 사고로 죽은 내 아내의 이름도 기억 못 하잖아요. 우리가 “우리 때문에 이혼하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구구절절 단서를 달았잖아요. “너희를 위해서 희생한 건 맞지만, 너희 탓은 아니야.”라고요?

더 속이 터질 일은, 그 모든 게 그렇다고 딱히 대단한 악의가 있어서 벌인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빈프리드는 서먹해진 딸과 아버지 사이를 복원해보고 싶었고, 로얄은 갈 곳 없는 노년이 되자 자연스레 가족의 품이 그리워졌을 뿐이다. 둘 다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느라 자식들의 속을 박박 긁어대는 건 매한가지이지만, 이 대책 없는 노인들이 바라는 건 사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딸 이네스가 인생을 보다 충만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네스의 커리어를 박살 내는 빈프리드도, 비행기 사고의 트라우마로 자식들을 과보호하는 채스(벤 스틸러)의 의사 따위는 무시한 채 손주들을 데리고 온갖 위험한 일들은 다 즐기고 다니는 로얄도, 손가락질하고 내치려고 보면 또 그러기가 쉽지 않다. 저 노친네가 무슨 마음으로 저러는지 알 것 같으니까. 서로에게 독한 말과 무례한 행동을 표창처럼 던져대며 상대의 인생으로 정면충돌한 자식과 부모는, 그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서로의 삶에 침습하고 난 뒤에야 깨닫는다. 우리가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구나.

우여곡절 끝에 공감과 이해에 도착해도 그때뿐, 이미 다 커서 제 몫의 삶이 따로 있는 자식과 부모 사이는 다시 스치듯 어긋난다. 아버지가 끼던 틀니를 끼고 웃어 보이던 이네스는 사진기를 가지러 간 아버지를 기다리다 지쳐 틀니를 빼 버린다. 마법 같은 화해의 순간이 손에 잡으려 하면 다시 포르르 날아가 버리는 새마냥 그렇게 날아갔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늘상 함께 있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느슨하게 궤도를 공유한 채 공전하는 행성들처럼 돌다 보면 언젠가 다시 마주칠 사이라는 걸 확인한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때가 되면 우린 다시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서로의 삶으로 충돌해 들어갈 것이다. 여전히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오해하고 상대의 의사를 넘겨짚으며. 토니 에드만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가명이나 위암이라는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앞세워서.

<로열 테넌바움(2001)>
감독 웨스 앤더슨
출연 진 핵크만, 안젤리카 휴스턴, 벤 스틸러, 기네스 팰트로, 루크 윌슨, 오웬 윌슨, 빌 머레이
시놉시스
로얄 테넌바움과 그의 아내 에슬린 테넌바움에게는 세 명의 어린 자녀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 세 명의 자녀는 부모가 별거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산다. 채스(벤 스틸러)는 10대 초의 나이에 부동산 투자 전문가가 됐고 국제금융에 관해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입양된 딸인 마고(기네스 팰트로)는 극작가이며 15세 의 나이에 브레이버만 그란트(Braverman Grant) 상과 부상으로 5만 달러를 받은 경력이 있다. 훗날 퓰리처상까지 수상한다. 리치(루크 윌슨)는 주니어 챔피언 테니스 선수이며 3년 연속 US 오픈 타이틀을 획득한 경력이 있다.
하나같이 천재였던 이들 세 남매들의 어린 시절은 20여 년에 걸친 배신과 실패 그리고 비극적인 사고로 인하여 그들의 기억 속에서 모두 사라져버린다. 그들의 천재성이 꽃을 피우지 못한 것은 모두 그들의 아버지 탓이었다. <로얄 테넌바움>의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산산조각 난 가족들이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겨울날,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알려온 아버지 때문에 한 집에서 다시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