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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할 것과 남길 것으로 가진 물건들을 분류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한답시고 짐을 정리할 때, 난 수년간 모아왔던 VHS 테이프들을 정리해 버렸다. VHS의 시대도 지났고, 어차피 VCR 플레이어가 고장 난 이후로는 모아둔 컬렉션을 들춰본 적도 없었으므로. 결정적인 건 가족의 잔소리였다. 뭐 그런 걸 다 떠안고 사니. 방에 자리가 없잖니. 나는 별생각 없이 VHS 테이프들을 싸그리 버렸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작은누나가 녹화해 뒀던 TV 프로그램 테이프들도 그 참에 함께 버려졌단 사실을 깨달은 건 몇 년 뒤의 일이었다. 평생 걷는 게 수월치 않아 주로 집에만 있었던 누나의 몇 안 되는 친구는 TV였고, 그런 그가 나름 고심해서 녹화한 테이프들은 나의 무심함 때문에 내 곁에서 영영 사라졌다. 나는 공간을 얻었고, 그 대신 작은누나의 흔적을 잃었다. 하루 치의 목숨과 전화, 영화, 시계, 고양이의 존재를 맞바꾸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의 ‘나’(사토 타게루)를 보며 딱해 하다가, 문득 몇 년 전 이삿짐을 싸던 나를 떠올렸다. 진짜 딱한 인간은 따로 있었구만.

물론 그 VHS 테이프들을 죄다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내가 그걸 틀어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VCR 플레이어도 없거니와, 몇 년씩 보관하고 있었을 때에도 틀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리는 왜 일견 쓰잘대기 없어 뵈는 것들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고 부둥켜안고 사는 걸까? <비 카인드 리와인드>의 비디오 대여점 주인 플레처(대니 글로버) 또한 그랬다. 시의 재개발 계획에 맞서 어떻게든 건물을 살려보려는 노력을 하다가 가로막힌 순간, 플레처는 “우리만의 영화를 만들어 상영하자”는 점원 마이크(모스 뎁)와 그의 친구 제리(잭 블랙)와 알마(멜로니 디아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철거가 예정된 일주일 안에 영화를 완성해 상영하고, 기부금을 받아 그것으로 건물을 시의 안전기준에 맞춰 리노베이션하겠다는 계획안을 제출해 건물을 살려보자는 제안은 원대했고, 원대한 만큼 이뤄지기 어려운 꿈이었다. 영화 상영 당일, 다시 말하자면 철거 예정일, 건물을 살릴 수 있을 거란 희망에 차 있던 단골손님 페일윅즈(미아 패로우)에게 플레처는 말한다. 철거를 수락했다고. 이 돈으로는 건물 지붕 수리조차 못 할 거라고. 그러니 다 함께 마지막으로 즐겁게 영화를 보고, 이 건물을 떠나자고. 아니, 건물을 살리지도 못할 건데 왜 이를 악물고 영화는 만든 겁니까?

201611_bekindrewind_2 전설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팻츠 월러가 이 건물에서 살았다고 우기는 영화 내용도 사실은 죄다 플레처가 꾸며낸 거짓이었다. 영화 중반, 마이크는 플레처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묻는다. 플레처는 답한다. “팻츠는 행복한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여기에서 살았다고 이야기해주면 네게 이곳이 더 의미 있는 곳이 될 거라고, 너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마이크는 진실을 알고 난 뒤에도 끝끝내 팻츠가 여기 살았노라는 내용으로 영화를 채운다. 아마 그 때문이었겠지. 그들이 만든 영화의 내용은 다른 이들에겐 허무맹랑한 거짓말일테고, 기부금으로 건물을 살리겠다는 계획 또한 애초에 불가능한 망상이겠지만, 적어도 그것들이 플레처와 마이크, 제리, 알마와 페일윅즈에겐 진실이었을 테니까. 살다가 너무도 깊게 절망에 잠기는 순간이 온 어느 날, 함께 영화를 만들고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하며 웃었던 기억들을 꺼내어보는 것으로 그 순간을 버텨낼 것을 알았을 테니까.

우리는 우리가 이룬 성취나 승리의 기억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우리를 구성하는 것의 대부분은 의외로 그보단 훨씬 더 자질구레한 것들이다. 친구와 영화 명대사 주고받기, 즉흥적으로 떠난 료칸 여행, 나의 영웅이 내가 살고 있는 이 건물에 살았노라는 악의 없는 거짓말, 두 번 다시 꺼내 볼 일이 없어도 벽장 속에 빼곡하게 쌓아둔 VHS 테이프 같은 것들. 승리와 성취를 찬미하는 일의 절반만큼이라도 공을 들여 그런 자질구레함을 보듬어준다면 어떨까. 난 어서 이 글을 마치고 고양이를 쓰다듬어주러 가야겠다.

<비카인드 리와인드(2007)>
Be Kind Rewind
감독 미셸 공드리
출연 잭 블랙, 모스 데프
시놉시스
전력발전소에서 감전사고를 당하게 된 제리(잭 블랙 분)는 우연히 친구인 마이크(모스 데프 분)가 일하는 비디오 가게에 들렀다가 자력으로 인해 모든 테이프들을 지워버리고 만다. 주인에게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한 편 두 편 고객이 원하는 영화들을 맞춤식으로 직접 제작, 촬영, 연기하게 되면서 이들은 일약 스타가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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