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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새끼손가락이 부러져 반 깁스를 했다. 병문안을 제외하고는 정형외과에 가본 적이 없는 나에게 이례적인 일이다. 불안한 내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달 동안 깁스를 해보고, 뼈가 안 붙으면 수술을 고려해봅시다”라고 무심히 말하는 의사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네?!”하고 큰 소리를 내버렸다. 일상으로 돌아오자마자 새끼손가락의 부재는 바로 느껴졌다. 타자를 칠 때는 물론 커피를 마실 때도 새끼손가락은 계속 걸리적거렸다. 퇴근 후 밀린 설거지를 시도했다가 ‘악’ 소리도 안 날 만큼 아파서 그만두고 말았다. 처음 겪는 골절상에 몸과 마음이 지쳐갈 무렵 예외 없이 마감은 다가왔고 평소보다 느렸지만, 이번에도 어떻게 정해진 기한은 지켰다. 마지막 원고를 올리고 나면 대개 속이 후련하기 마련이거늘 어쩐지 이번에는 기분이 너덜너덜했다.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나 지금 열심히 살고 있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해무처럼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 삐걱거리긴 해도 무탈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 자기 위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열심히’의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처음 하는 것도 잘해야 하고 작은 실수도 결코 가볍게 넘어가는 법 없는 냉혹한 사회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은 물론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 혹은 느낌마저 소진되어 간다.

쓸데없는 ‘진지병’이 마음 한구석에서 부풀어 갈 때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책장을 살펴보았다.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벼운 위로 정도 해줄 책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라는 꽤 자극적인 홍보 문구가 내 눈길을 끌었다. ‘과연’ 하며 펼친 이 책에서 만난 사노 요코는 ‘역시’였다. 글쓰기는 자아의 노출하는 공포와 욕망 사이에 있다는 데 동의하는 데, 그녀에게 공포란 건 거의 찾기 힘들었다. 누구도 쉽게 따라가지 못할 솔직함과 유쾌함까지 두루 가진 그녀가 부러워졌다.

“아아, 인류여, 남자여, 여자여, 어쩌면 이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가. 나는 타인의 성실함 때문에 멍해지고 만다”

술에 취해 휘청거리면서도 테이블 위 담배와 성냥을 1센치 간격으로 정확히 유지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다미야 군, 약속에 5분 늦는다고 하면, 1초의 오차도 없이 딱 5분 만에 나타나는 야마시타 씨, 자신의 옷은 물론 아내의속옷까지 색깔별로 정리해 위치까지 기억해 두는 사토 군까지. 그녀는 종잡을 수 없는 일상 속에서 나름의 잣대를 세워 부지런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탄식하는 한편, 본인은 다른 종류의 사람임을 확신한다. 그녀는 성실함을 미덕으로 갖고 살아가는 현대인보다는 팔자 좋게 신주쿠 지하도에 누워 뒹굴뒹굴 하는 아저씨들을 보며 세상을 다 가졌다고 생각한다. 실제 그녀는 삶에 ‘고급 철학’같은 것은 두지 않은 채 그저 식당 테이블에 앉아 몇 시간이고 멍하니 창밖의 참억새를 바라보는 걸 즐기곤 한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바지런히 무엇인가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능력이다.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능력은 작가는 8년 넘게 키워온 할아버지 고양이에 대한 생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잠이나 자며 사료를 먹는 게 전부인 나이 든 고양이가 가끔 생선 잔반을 주면 털을 세우고 미칠 듯이 좋아하는데, 그녀는 이를 보며 ‘역시 행복은 현실에 어쩌다 한번 등장해야 하는 것’이라며, 우리집 고양이 하나는 참 잘 키웠다고 호탕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만약 그녀가 지금 내 상황이라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손가락에 칭칭 감겨있는 붕대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평상시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찾아 헤매며 즐거운 일상을 이어나갈 것이다. 좌절 따위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비결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어본다면 아마 그녀는 한 손에는 맥주를 든 채 “괜찮아! 인생 뭐 있나?!”하고 껄껄 웃어넘기지 않았을까 싶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지은이 사노 요코
옮긴이 서혜영
출간 정보 을유문화사 / 2016-03-20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저자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까지 쓴 유쾌하고 박력 넘치는 생활 일기를 담아낸 <사는게 뭐라고>, <죽는게 뭐라고> 등 ‘뭐라고’ 시리즈로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노 요코가 중년기에 썼던 일상의글들을 모아 엮은 에세이 집이다. 원래 일러스트레이터로 먼저 이름을 알린 그녀는 밀리언셀러 <100만 번 산 고양이>로 유명해진 작가이기도 하다.
작가는 독특한 발상과 인간의 심리를 심도 있으면서도 유쾌하게 그려내며 대중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간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는 그녀가 40대 중반, 그러니까 1980년대에 쓴 수필집이다. 가난했지만 잊지 못할 추억이 서린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얽혀 사는 웃기고도 슬픈 에피소드, 엄마보다 현명한 자식과 아웅다웅 오가는 대화, 오랜 시간 함께해온 애완동물 등 먹고, 자고, 즐기며 나이 드는 일상 이야기가 거침없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이 책을 옮긴이는 “그녀의 더 없는 솔직함으로 독자의 마음 깊은 곳까지 어루만져준다”고 전하며 “너무나 솔직하여 조금은 창피한 마음으로, 그런 솔직함과 자유분방함이 만들어 내는 유쾌함 덕분에 번역하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다”고 전한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열심히 읽지 않고 즐기다 보면 우리는 나이를 먹는 것이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님을, 살아온 날들보다 더 남은 생에 대한 희망을 품고 씩씩하게 살아나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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