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악필인 데다가 너저분한 필기 습관을 지닌 내가 가지런하게 무엇인가를 끄적이는 유일한 순간이 바로 ‘필사’의 순간이다. 틈틈이 쌓여있는 시를, 소설을, 어디에선가 주워 온 브로셔의 글들을 베껴 쓰다 보니 시간은 차분히 흐르고 어지러운 생각도 가라앉아서 오랜 시간 이 일을 습관처럼 해왔지만, 문장을 모아두었다거나 필기구를 추천할 수 있다거나 필사하기 좋은 책을 추천한다거나 할 수 없었다. (물론 필사를 시작한 이유와 방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리고 책 <필사의 기초>가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게 해주었다. 역시 ‘기초’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필사의 기초>를 쓴 저자 조경국은 경상남도 진주의 헌책방 ‘소소책방’을 꾸리는 책방지기이다. 그는 10여 년 넘게 필사를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 오다가 마흔이 되던 해에 헌책방을 냈고, 자신만의 방법론을 책으로 펴냈다. <필사의 기초>에는 필사의 매력, 독서와 필사의 관계, 편안한 자세, 글씨의 모양, 메모에 대한 단상, 글쓰기 자체와 베껴 쓰면 좋은 책, 그리고 문구 추천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다. 세심하고 촘촘한 문장 사이에 써낸 이의 감상이 함께 실려있는데 경어체의 말 하듯이 쓰인 문장에서 “한 줄의 좋은 문장에는 인간과 세계의 진실이 담겼다”는 힘 있는 명언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확신도 든다.

잔잔하고 고요한 취미를 찾고 있거나 종이와 필기구와 책과 나의 관계가 궁금한 이들에게, 펜을 잡던 손끝의 감각이 그립고, 글쓰기-읽기의 또 다른 시공을 맛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사각사각 꾹꾹 눌러 담아 종이에 문장을 베껴 쓰는 일인 ‘필사’를 권한다.

<필사의 기초>
지은이 조경국
옮긴이 공보경
출간 정보 유유 / 2016-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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