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처음처럼 바보 같고 무모하게
이것은 4D 영화인가. <에브리바디 원츠 썸!!>(2016)은 관객의 얼굴을 향해 테스토스테론을 직사하는 영화다. 사고 치지 말라는 코치의 말은 귓등으로 넘긴 채 온갖 술이란 술은 다 섞어 마시고, 오만 여자애에게 치근대며, 괜한 호승심을 겨룬답시고 서로의 주먹을 피멍이 들 때까지 때리다 말고 사이 좋게 마리화나를 말아 태우는 제이크(블레이크 제너)와 동료 야구부원들을 보라. 이 모든 게 개강 직전 나흘 동안 일어난 일이다. 하긴, 그 방향성이 좀 달라서 그렇지 나라고 그 시절을 덜 멍청하고 덜 무모하게 보내진 않았다.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우며 친구들과 떠들었고, 하루가 멀다고 심야 영화 마라톤을 보러 다녔고, 신나서 극장 계단을 몇 개씩 뛰어 내려가다가 발목이 접질리던 밤도 있었으며,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다 말고 길바닥에 떨어진 장초를 좋다고 주워 태우던 멍하고 혼란스럽던 나날들이 가득했다. 그 반짝거림이 영원할 줄 알고 체력과 시간과 가능성을 탕진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안 해도 되는 싸움을 하고 안 하면 좋을 말실수를 하고 만지지 말라는 거에 손을 대서 부숴 먹는 흑역사의 연속. 왜 청춘은, 청춘 영화는 별 예외 없이 한심하고 멍청한 짓들로 점철된 걸까? 윌러비(와이엇 러셀)는 말했다. “어떤 틀 안에서 의외성을 찾는 거, 예술성은 거기 있는 거야. 너희들이 누군지를 찾는 게 중요해. 우주에서, 음과 음 사이에서 날 찾는 거야. 그 주파수에 귀를 기울여봐. 칼 세이건이 말했듯, 생명체의 아름다움은 구성하는 원자가 아니라 그 원자들이 결합하는 방식에 있는 거야.” 생명의 아름다움은 원자가 결합하는 방식에 깃드는 거지만 그러려면 일단 결합해야 할 원자가 있어야 한다. 몸만 크고 머리는 아직 아이인 시절, 우린 저마다 자신을 정의할 만한 원자들을 찾아 헤매는 건지도 모른다. 나란 사람의 틀 안에 방점을 찍어줄 의외성을 찾기 위해, 아무 것에나 덤벼들어 깨지고 구르면서.
내가 딱 스물이 되어 모든 게 다 혼란스럽던 시절, <스패니쉬 아파트먼트>(2002)란 작품이 개봉했더랬다. 스페인에서 스페인 경제 관련 학위를 따오면 공무원 자리를 보장해주겠다는 아버지 친구의 약속에 바르셀로나로 유학을 온 프랑스 청년 자비에(로맹 뒤리)는 유럽 각국에서 날아온 친구들이 빚어내는 기괴한 불협화음 속에 제 몸을 맡긴다. 카스티야어와 카탈로니아어를 모두 사용하는 바르셀로나라는 지역적 특성, 바에서든 거리에서든 클럽에서든 공간의 구분 없이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 저마다 영국, 덴마크,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독일인의 기질을 숨기지 않는 동시에 모두가 하나의 유럽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 하우스메이트들…프랑스인으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던 자비에는, 마치 조각보를 기우듯 이 모든 혼란과 충동과 비정형의 특질들을 끌어 모아 ‘유럽인’으로서의 자신을 완성해 파리로 돌아간다.
슬프게도 두 영화를 공히 감싸고 있는 낙관주의의 공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됐다. 하나의 유럽으로 맞이할 담대한 미래를 꿈꾸던 <스패니시 아파트먼트>의 유럽연합은 브렉시트라는 파열음과 함께 부숴지기 시작했고, 80년대 특유의 낙관주의가 몽글거리던 <에브리바디 원츠 썸!!>의 미국은 양극화와 인종 갈등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30대 중반이 된 나도 이제 스무 살의 내가 가지고 있던 무모함 따윈 잊어버린 고루하고 간이 작은 회색의 어른이 됐다. 꿈이 사라진 자리, 아 저렇게 모든 게 간단하고 가능성이 열려 있던 시절이 있었지 하고 한탄하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매 순간 처음처럼 바보 같고 무모하게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산꼭대기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일을 반복하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의 운명을 몰두하고 의미를 부여할 일을 받았으니 축복이라고 해석하는 제이크처럼, 기껏 얻은 직장을 제 발로 박차고 나와 두 팔을 활짝 펼쳐 텅 빈 미지의 하늘을 향해 활주로를 달리던 자비에처럼. 결국 한계를 설정하는 건 내 자신이고,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지는 미지의 하늘을 향해 이륙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L’Auberge Espagnole
감독 세드릭 클래피쉬
출연 로망 뒤리스, 주디스 고드레쉬
시놉시스
25세의 건장한 프랑스 청년 ‘자비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작가를 지망하지만, 아버지의 친구분으로부터 스페인어와 경제학석사를 따야 어딜가나 꿀리지않는다는 충고를 듣는다. 이에 따라 유럽교환학생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를 통해 스페인에서 1년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홀어머니와 사랑하는 애인을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장래를 위해 꿋꿋이 바르셀로나로 향한다. 어렵사리 숙소를 구한 자비에는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덴마크에서 온 혈기 왕성한 학생들과 룸메이트로 왁자지껄하게 지내게 된다. 문화적, 언어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제 각각의 라이프스타일이 충돌하면서 웃지 못할 헤프닝은 벌어지고… 그래도 서로를 위해주는 마음이 조금씩 싹터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