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듯 천천히 시간을 함께 보내면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에세이집이 지난 여름 출간됐다. <걷는 듯 천천히>(문학동네)가 제목이다. 이 책에서 그가 들려준 아버지 이야기 한 토막.
“매년 태풍 때가 되면 온 가족이 난리가 났다. 지붕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밧줄로 묶거나, 창 전체를 함석판으로 둘러막기도 했다. 그것은 평소엔 집에서 별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던 아버지의 역할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빨래건조대 너머 펼쳐진 옥수수밭이 훤히 보이던 창문이 함석판으로 가로막히면서 6조 다다미 방은 갑자기 어두워진다. 밖에서 못을 치는 쇠망치 소리가 울린다. 이것이 나에게는 태풍의 소리다. … (중략) … 그런 어머니도 아버지도 지금은 없다. 그러나 지금도 태풍이 오면 나는 그 쇠망치 소리를 떠올리며 조금은 두근두근한다.”(100쪽 ~ 101쪽)
책장을 거꾸로 넘겨 맨 앞 페이지를 편다. ‘머리말을 대신하여’라는 작은 제목 아래, 이번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써놓았다. 촬영 때문에 집을 비웠다가 한 달 반 만에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밤이었다던가.
“세 살 배기 딸은 방 한구석에서 그림책을 읽으며 힐끔힐끔 나를 신경쓰는 기색이었지만, 좀처럼 곁에 오려 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긴장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도리어 나도 긴장이 돼버려서, 둘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흐르는 채 그날 밤이 지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일하러 나서는 나를 현관까지 배웅 나온 딸이 “또 와”라고 한마디 건넸다. 아버지로서 나는 엉겁결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내심 꽤 당황했고 상처를 받았다. … (중략) … ‘피가 섞였다’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구나.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고는 ‘역시 시간인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5쪽 ~ 6쪽)
어느 날 딸이 건넨 한마디 “또 와”에 자극받아 쓴 시나리오. 가족을 가족이게 하는 건 역시 핏줄이 아니라 시간인 건가, 하는 그의 고민이 그대로 담긴 이야기. “더욱 극적이고 뼈아프게, 즉 ‘피’인지 ‘시간’인지,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상황으로 주인공을 몰아붙여보자고” 마음 먹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리하여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를 만들었다. 6년 동안 키운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러니까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뒤바뀐 사실을 6년 만에야 알게 되었을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라도 친자식을 데려와야 할까, 아니면 키우던 자식을 계속 키워야 할까? 쉽지 않은 질문이 담긴 영화를 만들면서 그는 단 하나의 원칙만 세웠다고 한다. “‘이야기’ 보다 ‘인간’이 중요하다”는 원칙.
“‘병원에서 아이가 뒤바뀐다’는 선정적인 사건을 플롯에 넣으면 관객의 시선과 의식은 아마 ‘부부가 어느 아이를 선택할까’라는 질문 쪽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나 그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이 너무 강하면, 그 이면에서 숨쉬게 마련인 그들의 ‘일상’이 소홀해진다. 그래선 안 된다. 끝까지 일상을 풍성하게, 생생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6쪽 ~ 7쪽)
그래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일상의 디테일로 승부를 건다. “목욕을 마치고 어머니는 아이의 머리를 어떤 식으로 말려줄까?” “세 식구는 침대 위에 어떤 순서로 나란히 누워, 어떤 식으로 손을 잡을까?” 뭐 그런 것들을 더 세심하게 신경 썼다. “언뜻 봐도 일상에서 볼 수 있을 듯한 생활을 충실하게 묘사하지 못하면 이 영화는 실패라고 생각했다”는 감독의 다짐 위로, 그가 책에 쓴 아버지의 일화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말하자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중요한 건 언제나 ‘태풍’이 아니라 ‘태풍의 소리’다. 그의 영화는 늘 ‘세찬 바람 소리’ 대신 ‘약한 쇠망치 소리’로 태풍의 본질에 다가서려 한다. ‘병원에서 아이가 뒤바뀐다’는 플롯이 태풍이라 한다면, ‘목욕을 마치고 아이의 머리를 말려주는 어머니’의 일상이 바로 쇠망치 소리일 것이다. 바람 소리에선 고작 ‘태풍과 함께 한 시간’을 떠올릴 뿐이지만, 다행히 쇠망치 소리 덕분에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까지 떠올린 경험이 감독에겐 이미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플롯 보다 일상. 사건 보다는 시간. 차곡차곡 세심하게 쌓아 올린 일상 묘사 덕분에 그의 영화는 이번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역시, 그들의 ‘사건’이 아니라 그들의 ‘시간’을 함께 경험하게 만든다. 가족을 비로소 가족으로 만들어주는 건 핏줄 보다는 역시 함께 보낸 시간이 아닐까, 하는 감독의 생각이 <바닷마을 다이어리>에도 담겨있다. 이야기 보다 인간이 중요하기에 끝까지 일상을 풍성하고 생생하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감독의 원칙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만들 때와 같다. 걷는 듯 천천히, 그렇게 료타는 아버지가 되어 갔다. 역시 걷는 듯 천천히, 스즈는 그렇게 배다른 세 자매와 한 식구가 되어간다. 두 편의 영화를 모두 보고 나면 관객 마음 속에도 저마다의 쇠망치 소리가 남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언제나, 조금은, 두근두근해진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Like Father, Like Son (2013)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후루야마 마사하루, 오노 마치코, 마키 요코
시놉시스
자신을 닮은 똑똑한 아들,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함께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는 성공한 비즈니스맨 료타는 어느 날 병원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6년 간 키운 아들이 자신의 친자가 아니고 병원에서 바뀐 아이라는 것. 료타는 삶의 방식이 너무나도 다른 친자의 가족들을 만나고 자신과 아들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고민과 갈등에 빠지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