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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장사 마돈나> (2006)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등>을 보고 나서 한참을 고민했다. 나도 뭔가 맞으면서 배웠던 적이 있었던가? 간신히 떠올려낸 기억은 두 개였다. 나눗셈의 값을 앞에서부터 쓰는 게 아니라 곱셈 하듯 뒤에서부터 썼다는 이유 하나로 복도 쪽 문 앞에서 시작해 창가에 도착할 때까지 교실을 가로지르며 뺨을 맞았던 초등학교 3학년의 어느 날과, 모의고사 수학 성적이 만점에서 1점씩 빠질 때마다 한 대씩 ‘빠따’를 맞았던 입시학원의 나날들. 왜 이렇게 기억해내는데 오래 걸렸을까 생각해보다가, 은연 중에 ‘그 정도야 뭐 별 일 아니었지’라고 내게 가해진 폭력을 애써 합리화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아서 부은 얼굴로 집에 들어갈 수 없어 놀이터에서 서성였던 시간이나, 피멍이 든 엉덩이에 서로 소염진통제 연고를 발라주던 학원 동기들과의 시간을 싹 다 잊고 싶어서 그랬던 거겠지.

슬프게도 폭력은 종종 되물림된다. 학교 서클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다 너 잘 되라고 한 일’이란 말을 들으며 유무형의 폭력을 견뎌왔던 이들이 훗날 그 폭력을 고스란히 아랫사람에게 전달하는 광경은 얼마나 흔한가? 남 얘기가 아니다. 실수를 자주 저지른 탓에 선임으로부터 폭언과 얼차려에 시달렸으면서, 정작 병장이 된 후엔 부대 내 기강을 잡는다고 후임들에게 얼차려를 주다가 ‘아, 이게 내리갈굼이란 건가’ 싶어 뒤늦게 사과한 못난 위인이 바로 나다. 폭력을 되물림하려 했던 내 자신을 끝내 용서하진 못했지만, 그 경험을 하고 난 뒤엔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를 볼 때 비난의 목소리를 내기 전에 잠시 주춤하게 된다.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를 비판하는 건 가장 쉽고 타당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을 ‘사회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적극 방조하는 구조적 모순은 건드릴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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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 폭력에 길들여지지 않고 거부해 낼 수 있다면, 어쩌면 이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지 않을까? <4등>의 김광수 코치(박해준)가 자신을 찾아 해장국 집까지 달려온 제자 준호(유재상)에게 의외의 제안을 던지던 순간, 난 <천하장사 마돈나>의 결말 부분을 떠올렸다. 고교 씨름 선수 동구(류덕환)는 성 전환수술 비용 마련을 위해 씨름 대회에 출전하지만, 왕년의 권투선수 출신 술주정뱅이 아버지(김윤석)는 여자가 되겠다는 아들을 용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어 주먹을 퍼붓는다. 그 주먹을 다 맞고도 피투성이가 된 채 기어이 결승전을 치르러 간 동구, 화급히 그 뒤를 쫓아간 아비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아들을 붙잡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을 건넨다. “가드 올리고, 상대방 주시하고.”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편견과 싸우며 살아야 하는 길을 한사코 걷겠다는 아들에게, 평생을 주먹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패배하며 살아 온 못난 아비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스스로 방어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동구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 아버지의 가르침을 배반해 변칙으로 승리를 거둔다. 방어도 포기하고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조차 감은 채, 그 순간의 자신에게 충실함으로써. 아버지는 동료들의 무등을 타고 승리의 순간을 만끽하는 동구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쓸쓸한 표정으로 뒤돌아 경기장을 떠난다. 아비가 당연하다 여겨 온 세상의 룰을 아들은 거부했고 끝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겼다. 어쩌면 아들은 약한 이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지 모른다. 어쩔 수 없다 여기며 정당화해 온 폭력의 고리가 끊어졌으니, 자신에게 남은 건 퇴장 밖엔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안다. 이런 글을 써놓고도 언젠가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자신을 속이고 싶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걸. 후임들한테 한 번 그랬던 놈이 두 번 그러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 하지만 그럴 때마다, 풀장을 가르는 준호의 영법이나 상대의 샅바를 놓아버린 동구의 모습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용기 내어 가르침을 빙자한 폭력에 반문해야 비로소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단 걸 알려준 두 소년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천하장사 마돈나(2006)
Like a Virgin
감독 이해영, 이해준
출연 류덕환, 김윤석
시놉시스
고등학교 1학년 뚱보 소년 오동구. 육중한 몸매와 달리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의 장래희망은 ‘진짜’ 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도 마돈나처럼 완벽한 여자가 되어 짝사랑하는 일어 선생님 앞에 당당히 서는 것!
동구는 여자가 되기 위해 수술비를 모으고 있는데, 딱 500만원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런 어느 날 날아든 낭보! ‘인천시 배 고등부 씨름대회’ 우승자 장학금이 500만원. 가진 거라곤 엄청나게 센 힘 하나뿐인 동구는 뒤집기 한판이면 마침내 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다. 하지만 동구는 죽을 맛이다. 하필, 남학생들과 웃통 벗고 맨 살 부대껴야 하는 씨름이라니! 마돈나가 되기 위해 천하장사부터 되어야 하는 뚱보 소년 오동구의 ‘여자가 되는 길’은 험하고 아찔하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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