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90>(2018)

“왜 판자 쪼가리에 미치는 줄 알죠? 이게 누군가의 영혼에 영향을 끼치거든요.” 한 무리의 아이들은 오늘도 스케이드보드 위에 오른다. LA의 쭉 뻗은 도로든, 후미진 뒷골목이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몇 뼘이 채 안 되는 너비의 ‘판자 쪼가리’는 아이들을 다른 세계로 날아가게 만드는 유일한 날개다. 일상적인 가난과 분노와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오직 자신들의 규칙과 의리로 지탱되는 작은 세계로.

햇살 아래 부서지는 아이들의 건강한 땀방울과 웃음소리. 이런 해사한 것들을 주목하는 영화를 상상했다면 그 기대는 어느 정도 내려놓는 것이 좋겠다. <미드 90>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꽤 터프한 성장담이다. 예쁘게 빛나는 순간보다 치기 어리게 방황하며 여기저기 부딪치던 순간들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열세 살 스티비(서니 설직)의 상황은 따분하다. 어린 나이에 싱글맘이 된 엄마(캐서린 워터스턴)는 그다지 좋은 보호자가 아니며, 형 이안(루카스 헤지스)은 수시로 심각한 폭력을 휘두른다. 가족 안에서 든든한 울타리를 경험해본 적 없는 스티비의 관심은 또래 무리에게로 향한다. 동네에서 스케이드보드를 타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스티비는 ‘땡볕(sunburn)’이라는 별명을 선사받은 뒤 모두에게 불량아 취급받는 이 무리의 일원이 된다.

레이(나-켈 스미스)를 중심으로 모인 아이들을 움직이는 8할의 힘은 허풍과 반항심이다. 이들에게 기성세대는 설전의 대상일 뿐이다. 스티비는 스케이드보드, 술과 파티, 때론 그보다 더한 자극이 있는 또래들의 문화 속으로 정신없이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이 세계의 속살은 연약하다. 아이들은 “X나 노력하는 뻔한 인생”을 또렷한 자의식으로 거부하는 듯 보이지만, 노력해봐야 달라질 것 없는 현실을 일찌감치 파악한 것뿐이다. 자기들 안에서 용감함으로 여겨지는 행동들은 실상 처연한 인정 투쟁에 가깝다. 스케이드보드로 대변되는 아이들의 또래 문화는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는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미드 90>의 시선은 냉소적인가. 아이들을 동정해야 할 주인공이나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보는가. 그렇지 않다. 알려졌듯 이 영화는 배우 조나 힐의 연출 데뷔작이다. 어느덧 30대 후반이 된 그는 CD 플레이어, 스트리트 파이터, VHS 테이프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케이드보드의 시대였던 1990년대의 아이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 모습은 일정 부분 감독 자신의 과거이기도 하고, 달라진 풍경 안에서 지금도 어디선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을 성장의 한 대목이기도 하다.

4:3의 브라운관 화면비, 랩 음악, 홈 비디오 스타일 등 1990년대의 트렌드를 적용한 것은 단순히 영화의 스타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장의 한 시절을 이미 통과한 누군가가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너처럼 세게 부딪치는 놈은 처음 봐, 그렇게 세게 부딪치지 않아도 돼.” 레이가 스티비에게 건네는 따뜻한 조언은, 멍청한 실수와 뜻밖의 사고를 수없이 경험하던 과거의 자신에게 현재의 우리가 남기고픈 메시지이기도 하다. 감독 스스로가 자신의 청소년기를 성찰하는 입장과 카메라 뒤 관찰자의 입장 사이에 서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소년 버전의 <레이디 버드>(2018)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케이드보드 타기는 어딘가 뭉클한 구석이 있는 운동이다. 매끄럽게 잘 타기까지 스스로 끊임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해야 한다.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에 연약한 피부를 수도 없이 쓸려야 하는 경험이다. 자신 안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이건 의심할 바 없이 성장의 과정과 비슷하다. 그렇게 <미드 90> 속 아이들의 스케이드보드는 우리 모두의 가장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마음의 한구석에 와닿는다.

행동의 결과에는 책임이 따른다. 경험은 때론 상흔으로 남는다. 감독은 주인공들에게 이 냉엄한 진리 또한 적용한다. <미드 90>은 날카로운 현실 감각을 잊지 않는 영화다. 감상에 젖지 않고 이야기를 툭 자르듯 마무리하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 이유다. 스티비와 아이들의 시간이 영화 밖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시간이 그러했듯 말이다. 그 시절 스티비와 친구들은 지금쯤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어떤 삶의 풍경 속을 거닐고 있을까. 살면서 문득 한 번씩 떠오를 궁금증이다.

<미드 90>(2018)
mid90s
감독
 조나 힐
주연 서니 설직, 루카스 해지스, 캐서린 워터스턴
시놉시스
1990년대, LA. 스티비의 여름은 처음으로 뜨겁고 자유롭다. 그에게는 넘어져도 좋은 스케이트보드, 그리고 함께 일어서는 나쁜 친구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