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포티>(2006)

* 영화 <어스>와 <카포티>의 결정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은 피해주십시오.

지하세계 복도에서 펼쳐지는 애들레이드(루피타 니옹고)와 레드(루피타 니옹고)의 마지막 사투는 이상하게 서글프다. 지친 몸을 이끌고 사력을 다해 레드를 죽이려는 애들레이드를, 레드는 절제된 동작과 사뿐한 발걸음으로 능숙하게 피한다. 빙그르르 돌아 손에 쥔 가위로 일순에 애들레이드를 찌르고는 다시 뒤로 물러나길 반복하는 레드의 몸놀림은 흡사 잘 짜여진 발레나 플레뢰 경기를 보는 듯한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애들레이드와 레드의 진짜 정체와 관련된 걸까? 그보다는 누구든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절박해지면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는 쪽이 더 정확한 설명이리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질척거릴 이유가 사라진 레드와 달리 애들레이드는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으니까. 같은 조건에 떨어진다면, 과연 지하의 ‘테더드(Tethered)’와 지상의 우리(Us) 사이에 어떤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많은 이들이 <어스> 속 ‘테더드’를 멕시코 이민자들이나 네이티브 아메리칸으로 해석하지만, 꼼꼼히 뜯어보면 그 어떤 구체적 대상도 <어스>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스>는 인종과 국적, 성별과 경제적 계층, 신분 등 그 어떤 계급 격차 서사에도 느슨하게 적용할 수 있는 우화에 가깝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사회의 지배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들의 가치와 행동양식에 따를 것을 강요당한다. 지상세계의 인간들의 행동을 어설픈 버전으로 따라해야 하는 운명에 묶인 탓에 오히려 그 격차를 더 격심하게 느끼게 되는 <어스> 속 지하세계 테더드들과, 지배적 헤게모니를 따라가기 위해 발버둥치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현실 속의 하층민들은 제법 닮아 있다. 그리고 그 두 세계 사이의 구분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 애들레이드와 레드의 운명은 1986년 산타 모니카 해변에서 뒤바뀌었지만, 애들레이드는 애들레이드로 자랐고 레드는 레드로 자랐다. 인간과 테더드를, 상류층과 하층민을 구분짓는 건 오로지 환경이다.

1959년, 미국 캔자스의 작은 시골마을 홀컴에서 한 농장주 가족이 끔찍하게 살해당한다. 이미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생애 최고의 성공에 도달한 작가 트루먼 카포티는, 사건을 다룬 짧은 기사에서 대작의 영감을 느끼고 취재를 위해 달려들었다. 쓰기도 전부터 카포티는 작품이 엄청난 걸작이 될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이 작품은 단순히 사건 하나의 전말을 다루고 마는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1950년대의 모럴이 끝나는 자리에 60년대의 모순과 갈등의 징후를 포착한 작품이 될 것이며, 한 사건이 공동체 전체에 끼치는 영향을 기록한 빛나는 통찰의 집합체가 될 것이었다. 카포티가 몰랐던 한 가지는, 그가 범인 중 한 명인 페리 스미스와 기묘한 애정 관계에 빠질 거란 사실이었다. 카포티는 165 cm 가 채 안 되는 키 탓에 엽총 만한 사내라 불리웠다. 스미스도 키가 작았다. 카포티의 생부와 어머니는 결혼 생활 내내 삐걱거렸고, 어린 카포티는 친척들 집을 전전하며 자랐다. 스미스도 고아원에서 자랐다. 카포티는 끊임없이 자신의 교양과 문화적 식견을 자랑하는 것으로 제 자존심을 세웠다. 스미스도 그랬다. 카포티는 페리 스미스로부터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를 집필하던 시기를 다룬 전기영화 <카포티>에서, 카포티(필립 시모어 호프먼)는 친구인 넬 하퍼 리(캐서린 키너)에게 말한다. “이런 느낌이에요. 페리와 난 한 집에서 자라다가, 어느 날 그는 뒷문으로 나가고 나는 앞문으로 나간 거죠.” 그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기댈 수 있었던 것들, 교육과 문학, 새아버지의 존재, 뉴욕이라는 대도시 같은 자원들이 스미스(클리프톤 콜린스 주니어)에겐 없었을 뿐이라 여겼으리라. 그러나 스미스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카포티의 영혼은 망가져간다. 카포티가 혼신의 힘으로 써 내려간 르포르타주 소설 <인 콜드 블러드>를 출간하려면, 범인들은 사형 선고를 받아야 한다. 두 범인의 사형 없이는 자신이 구상한 소설을 맺을 수 없었다. 카포티는 스미스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스미스의 사형을 진심으로 바랐고, 상급심 결과가 늦춰지면 늦춰질수록 초조함과 죄책감에 불행해졌다. 애들레이드가 레드의 원망 어린 가정인 “그때 나를 함께 데려갔더라면” 따위를 들어줄 수 없는 것처럼, 카포티 또한 스미스의 불행과 기도보단 그의 사형선고가 더 급했다.

1966년 출간된 <인 콜드 블러드>는 대성공을 거둔다. 판매부수는 500만부를 넘겼고, 지금껏 접한 적 없는 압도적인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카포티는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후 카포티는 단 한 편의 작품도 완성하지 못한 채 술과 마약에 기대 살다가 1984년 알코올중독 합병증으로 눈을 감는다. 그가 미완으로 남기고 간 유작인 <응답 받은 기도>의 에피그라프는 다음과 같다. “응답 받지 못한 기도보다 응답 받은 기도에 더 많은 눈물이 모인다.” 마치 세상이 피 묻은 토끼의 날고기를 뜯어먹으며 괴로워하던 테더드들의 울부짖음을 모르듯, 같은 집에서 자라다가 앞문과 뒷문으로 나온 카포티와 스미스의 결과가 다르듯.

<카포티>(2006)
감독
 베닛 밀러
주연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 메릴 스트립, 캐서린 키너
시놉시스
1959년, 미국 캔자스주 한 농장의 일가족 4명이 두명의 남자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신문에서 기사를 읽은 트루먼 카포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작가적 영감으로 친구 작가 하퍼 리(캐서린 키너)와 함께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두 살인마를 만난다. 두 살인마 중 내성적인 페리(클리프톤 콜린스 주니어)에게 주목한 카포티는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감방에서 함께 생활하며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페리는 결국 자신과 비슷한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 카포티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사건 당일 밤의 충격적인 사건의 전모를 털어놓기 시작하지만, 자신의 완벽한 기억력으로 사상 최초의 논픽션 소설을 쓰던 카포티는 페리가 결정적인 사실 한가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형 집행 2주 전,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카포티 밖에 없다고 믿고 극단적으로 그에게 매달리는 페리를 외면하던 카포티는 페리에게 극적으로 마지막 사실을 끄집어내는데 성공하고, 소설을 완성하는데만 열중하지만, 사형 집행의 증인으로 페리와 마지막으로 마주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