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A Girl(1995), No Doubt

노 다웃(No Doubt)의 ‘Just A Girl’을ᅠ처음 들었을 때 나는 소녀였다. 교복을 입어야 하고, 학교를 가야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 일상에 큰 불만도, 의욕도 없는 아주 평범한 대한민국의 소녀. 용돈으로 씨디를 사모으지만 특별한 취향이나 안목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레코드 가게의 추천 리스트를 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소비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노 다웃의 3번째 앨범은 밴드에게는 벼락같은 성공을,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중학생에게는 반항심을 가져다주었다.ᅠ

“난 그저 소녀야/ 내가 밖으로 나갈 때마다 나에겐 많은 이유들이 붙어/ 도망치고 숨어야 하는 이유들이/ 왜냐하면 난 그저 소녀니까/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대”

그 시절의 나는 배고프지만 않으면 예민하지도 않고, 학교에서 내건 규율이나 부모의 잔소리에도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았지만 답답할 때가 있었다. 왜 추운 겨울, 교복 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입으면 안 되는지, 어째서 애초에 따뜻한 바지를 교복으로 만들지 않는지, 왜 엄마는 말끝마다 여자가 그렇게 앉으면 안 된다, 여자는 그런 거 먹는 거 아니다를 붙이셨는지. 귀찮아서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의구심은 그웬 스테파니의 울부짖는 목소리를 만나 형태를 갖췄다. 그것은 분노를 연료 삼는 반항심이라는 결정체였다. 그웬 스테파니의 터프한 무대 매너에 용기를 얻어 괜히 방문도 크게 닫아보고, 으르렁 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학원 가는 봉고차에 심각하게 몸을 실었다. 물론 인상 쓰는 것도 잊지 않아야 했다. 길게 기른 앞머리로 눈앞에 커튼을 내렸고 이어폰으로 세상과 단절한 무시무시한 중학생은 그렇게 사춘기를 통과했다.

그웬 스테파니의 카리스마에 크게 감화되어 밴드를 결성하거나 세기말적 아우라를 내뿜으며 모험을 떠난 틴에이저여야 노래의 명성에 걸맞은 결말이었겠다. 그러나 반항하기에는 너무도 게으른 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선물 받은 반항심을 껴안고 침대에 누워 반복재생을 거듭할 뿐이었지만 분출하지 못하는 화를 대신 폭발시키는 그는 나와 같은 소녀들의 대변인이었다. 1997년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 공연한 영상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웬 스테파니는 무대 위를 뛰어다니며ᅠ’Just A Girl’을 부르고 공연장을 장악해버리는데, 소녀들에게 마이크를 쥐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소녀 시절을 거쳐 온 뮤지션이 직접 쓴 가사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곳에서 온 소녀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난 예쁘장한 여자애일 뿐이야”라는 가사를 관객들과 함께 외치는데 거기에 담긴 분노와 더이상 그렇지 않다는 부정의 열기는 남성 관객들에게 똑같은 가사를 시켜봤을 때의 미지근한 온도와 대비된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지나 운명처럼 다시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ᅠ반가워서 까무러칠 뻔했다. 영화 [캡틴 마블]에서 캐롤(브리 라슨)은 엄청난 힘을 지니고도 늘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공군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파일럿으로서의 능력을 의심 받았고, 크리 제국에서는ᅠ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두는 주변의 목소리 탓에 스스로를 가뒀다. 그러나 캐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났고, 마침내 영웅으로 각성한다. 어마어마한 힘을 제 뜻대로 쓸 수 있게 된 후 속시원하게 악당을 때려 눕히는 신에서ᅠ’Just A Girl’ 이상의 OST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난 그저 소녀야/ 난 세상을 살아가는 한 소녀라고/ 이게 내가 나답게 존재하도록 나둬야 하는 이유야/ 네 경험에 근거해 대충 만든 규칙은 날 무슨 짐짝처럼 만들어/ 굴복하는 경험은 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 거야/ 지긋지긋해/ 정말 많이 참아왔어”

캐롤과 같은 강인한 여성에게도 가해지던 차별과 강요는 이곳의 평범한 여성들이라고 다를 리가 없다. 스스로를 짐짝처럼 느끼게 하는 규칙은 결혼을 강요 받거나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하는 존재로 여겨지거나 같은 일을 해도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고, 임신을 하면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뿌리 깊게 존재한다. 시간이 훌쩍 흘러 소녀들이 더 이상 소녀가 아니게 된 후라도 세상은 여전히 소녀의 틀에 여성을 가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수동적이고 무해하며 불만을 말하지 않는 존재.ᅠ’Just A Girl’에서 분홍 리본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소녀처럼. 하지만 애너하임의 평범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그웬 스테파니가 무대 위를 주먹질 하며 뛰어다녔듯, [캡틴 마블]에서 캐롤이 얻어터지고 코피가 나도 주먹을 쥐고 다시 일어난 것처럼 소녀들은 언제까지고 소녀가 아니다. 그들은 지금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지긋지긋 하다고, 정말 많이 참아 왔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