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정>(2014)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11장 23-24절)

가버나움은 대도시였다. 요단강이 갈릴리 바다와 만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일찌감치 어업이 발달했고,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타인을 지나 이집트까지 연결되는 무역로가 지나는 덕에 사람이 모여 번성하기 좋았다. 나무를 깎던 거친 손의 목수청년 또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펼칠 때 가버나움에 각별히 헌신하곤 했는데, 수많은 기적을 보이고 말씀을 들려줬음에도 가버나움 사람들이 회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청년은 탄식하며 말했다. 너희가,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애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해요. 여기서 제가 얻는 게 뭐죠? 욕먹고 얻어맞고 발길질 당하고. 사슬과 호스와 허리띠로 맞고. 사는 게 개똥 같아요. 내 신발보다 더러워요. 지옥 같은 삶이에요. 통닭처럼 불속에서 구워지고 있어요. 인생이 좆같아요. (<가버나움>, 자인의 말)

지금은 폐허만 남은 가버나움처럼,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에게 레바논 땅은 소돔만도 못한 땅이다. 가짜 처방전으로 사들인 마약성 진통제를 가루 내어 물에 개어 파는 것부터 시작해 돈이 되는 거라면 닥치는 대로 해치우며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면 돼지우리 같은 집에서 형제들끼리 팔다리가 엉킨 채 잠이 드는 자인에게 존중과 사랑은 먼 이야기다. 부모라는 사람들은 여동생 사하르(하이타 세드라 이잠)가 초경을 했단 사실을 알자마자 사하르의 얼굴에 진한 화장을 입히곤 매매혼으로 보내 버렸다. 팔려가는 여동생을 구해보려 안간힘을 쓰던 자인을, 부모는 짐승처럼 매질했다. 예수조차 “소돔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던 가버나움은 멀리 있지 않다. 끝없는 불의와 고통을 재생산하면서도 회개할 줄 모르는 땅이라면 거기가 가버나움이다.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은 그걸 바라지 않아요. 우리가 바닥에서 짓밟히길 바라죠.(<가버나움>, 자인의 말)

나딘 라바키 감독의 <가버나움>(2018)을 보며 난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을 떠올렸다. 사랑으로 보살피고 키우겠다는 부모의 약속, 구성원들을 존중하겠다는 사회의 약속, 시민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겠다는 국가의 약속. 그러나 약속을 지켜야 할 이들은 침묵하고, 부도어음처럼 값어치를 잃은 말들의 시체를 만지작거리던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폭력과 불법을 도구로 택한다. 자인이라고 옆집 꼬마애들이 타던 스케이트보드를 강탈하는 일이 달가웠을까. 약국을 돌아다니며 거짓말로 트리마돌을 사들이고, 그걸 불량배들에게 파는 일을 반복하는 게 즐거웠을까.

누나, 두고 보라고. 독하기로 따지면 촌장과 셩리보다 내가 한 수 위야. (<천주정>, 따하이의 말)

2000년대 중국에서 벌어진 실화들을 모아서 만든 지아장커 감독의 영화 <천주정>(2014) 속 인물들도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배반당했다. 인민공화국의 이상은, 중국 사회가 자본주의의 쳇바퀴를 급속도로 돌리기 시작하며 죄다 바스러졌다. 광부로 일하는 따하이(지앙우)는 마을 전체의 소유였던 광산을 독단으로 팔아 치운 촌장과 회사 대표를 고발하려 하지만, 공산당 기율 위원회에 보내려던 고발 편지는 주소를 정확하게 쓰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세상 속에 자리 잡지 못하고 정처없이 헤매다 강도 살인범이 된 조우산(왕바오챵)은 어머니의 생일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오지만,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고향은 이제 “도시로 떠난 아무개가 몸을 판다고 하더라”는 가십이나 떠도는 황폐한 곳으로 전락했다. 퇴폐 마사지숍의 카운터 직원으로 근무하는 샤오위(자오타오)는, “내가 돈이 이렇게 많은데 너는 왜 내게 몸을 안 파느냐”며 돈다발로 자신의 뺨을 때리는 손님들 앞에서 절망한다. 자신은 성매매 여성이 아니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아랑곳 않는 이 손님들은 심지어 공무원들이다. 의류 공장에서 사고를 치고 도망쳐 나온 샤오후이(루오란샨)는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고 싶지만 선택지는 협소하다. 성매매 업소의 웨이터가 되거나, ‘세계 500위 그룹’이라는 허울 뒤에 ‘죽음의 공장’이라는 오명을 감춘 노동착취의 공장으로 들어가거나. 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 더 이상 ‘인민’을 돌보지 않는 ‘인민공화국’의 황량한 초상이다.

총성이 울릴 때가 재미있거든. (<천주정>, 조우산의 말)

아무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세상 속에서, 인민들은 희망 대신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계속된 좌절과 굴욕에 따하이는 장총에 호랑이 그림을 휘감아 들고는 마을의 위정자들과 자본가들을 쏴 죽이고, 돈다발로 뺨을 맞던 샤오위는 과도를 꺼내 들어 손님을 벤다. 외부로 폭력을 휘두르지 못하는 이는 자기 자신을 향해 폭력을 저지른다. 세상의 더러움도 노동의 착취도 견딜 수 없었던 샤오후이는 공장 기숙사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상황을 대화로 평화롭게 풀어보려는 모든 노력은 의미를 잃고, 세상과 소통할 수단으로 폭력을 택한 인민들은 어느 순간 폭력이 아니면 흥미를 잃는 지경에 이른다. 여기도 ‘저승까지 떨어’진 땅, 가버나움인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창세기 18장 26절)

<천주정>이란 단어의 뜻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다. 지독한 역설이다. 저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리도 참혹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약속을 어긴 건 세상인데, 번성하는 세상 대신 그 죄의 무게를 짊어진 인민들은 신음하다가 죽어간다. <가버나움>도 마찬가지다. 갈릴리 청년 예수는 회개하지 못한 당대의 가버나움을 꾸짖었지만, 레바논에서 부모 세대의 죄의 대가로 죽어가는 건 어린 아이들이다. “통닭처럼 불속에서 구워지고 있”다고 절규해야 비로소 듣는 척해주는 세상에서, 이들을 어떻게 구하면 좋을까. 가도가도 의인 열 명을 찾기 어려운 세상, 서로가 서로를 구할 의인이 되지 못한다면, 이 모든 일들이 그저 남의 나라 일이라 생각된다면, 지금 여기가 바로 가버나움인지 모른다.

<천주정>(2014)
감독
 지아 장커
주연 강무, 자오 타오
시놉시스
돈에 눈이 먼 마을 촌장에게 대항하기로 결심한 광부 ‘따하이’, 폭력이 지배하는 현실에 회의를 느낀 시골 출신의 청부살인업자 ‘조우산’, 유부남 애인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사우나 직원 ‘샤오위’,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청년 ‘샤오후이’. 이들은 참혹한 현실에 부딪혀 거부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