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들>(2004)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소속 레지스탕스 요원들이 영국의 지원을 받아 나치 독일의 SS 보안방첩부 수장이자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총독대리였던 라인하르트 하인리히를 암살한 실제 작전 ‘오퍼레이션 안트로포이드’는 반복해서 영화의 소재가 된 사건이다. 제2차 세계대전사에서 나치 고관을 대상으로 한 암살 시도 중 유일하게 성공한 작전인 탓이다. 용감한 레지스탕스 청년들이 꽃다운 청춘을 바쳐 게슈타포와 SS를 한 손에 쥐고 휘두르던 ‘프라하의 도살자’, 유대인 대학살의 ‘최종 해결책’을 계획한 인간 백정을 암살하는데 성공한다는 내용은 언제 봐도 통쾌하니까. 영미권에서 만들어진 작품만 대강 헤아려도 프리츠 랑의 <교수인들도 죽는다>(1943)나 같은 해에 개봉한 <히틀러의 미친 인간>(1943), 한국에서 유명한 <새벽의 7인>(1975), 케네스 브래나가 라인하르트 하인리히를 연기한 HBO판 TV 영화 <컨스피러시>(2001), 비교적 최근작인 <앤트로포이드>(2016)까지 다섯 편이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만들어진 드라마와 영화까지 합치면 열 편이 우습게 넘어간다.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는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 영화는 레지스탕스군 얀 쿠비츠(잭 오코넬)와 요제프 가브치크(잭 레이너)가 작전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앞서, 러닝타임의 절반 가량을 할애해 라인하르트 하인리히(제이슨 클락)의 생애를 훑는다. 오만하긴 하지만 딱히 거대한 야심은 없었던 평범한 해군 중위 하인리히가, 어쩌다가 나치 독일의 수뇌인 프라하의 도살자가 되었는지를 되짚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묘사한 라인하르트의 삶은 참 지리멸렬하다. 그가 나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악에 대한 확신이나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비뚤어진 열정 때문이 아니라, 나치 당원인 리나(로자먼드 파이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였다. 리나와 놀아나느라 약혼녀를 버린 라인하르트는 혼인빙자간음 혐의로 군법 재판에 회부되는데, 그가 더듬더듬 늘어놓는 변명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깊은 관계가 아니었고… 제 평판을 깎아내리려는 그 여자의 수작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잖습니까.” 나치에 입당한 것 또한 거창한 신념이나 분노로 인한 선택이 아니었다. 해군에서 쫓겨난 뒤 갈 곳이 없어진 탓에 궁여지책으로 기어들어간 곳에서 라인하르트는 충성스러운 관료가 된다.

나치 독일을 다룰 때 많은 창작자들은 히틀러와 그 수하들을 살아있는 악마 그 자체로 그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들이 지상에 풀어놓은 악행의 규모가 평범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과정에서 나치 수뇌부는 가끔 의도치 않게 신격화되곤 한다. 압도적인 악이 지닌 카리스마에 매력을 느끼는 이들, 세간의 윤리 규범을 뛰어넘어 가공할 힘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악신을 동경하는 이들을 찾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전두환과 신군부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유린했는지 다룬 MBC 드라마 <제5공화국>(2005)에서 전두환을 연기한 이덕화의 카리스마에 매료된 젊은 우익 청년들이 전두환의 팬클럽을 만들었던 것처럼.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는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본 우리는 라인하르트의 삶이 얼마나 찌질하고 지리멸렬했는지 안다. 그러니, 그가 리나를 향해 마지막 유언이랍시고 “우리 아이를… 꼭 훌륭한 아리아인으로 키워줘…”라 말하는 광경을 보면서, 우린 편한 마음으로 중얼거릴 수 있는 것이다. 놀고들 있네.

내가 임상수 감독의 작품 <그때 그 사람들>(2005)을 떠올린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얀 쿠비츠와 요제프 가브치크의 용기와 의로움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순도 높은 비아냥으로 가득 찬 이 영화와 비교하는 게 결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그 사람들>은 그 비아냥의 힘으로 아직까지 툭하면 여기저기에서 미화되곤 하는 박정희를 정면으로 노려본다. 영화 속에서 ‘그 분’(송재호)은 정일권 전 총리가 물개를 밀수입한 이야기를 계속 해보라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경호처장(정인기)을 부추기는 주책 맞은 노인이자, 중앙정보부 의전과장(한석규)에게 술자리와 잠자리 시중을 들 젊은 여성들을 구해오도록 시킨 권력형 성 착취자이며, 경호실장(정원중)이 “캄보디아에서처럼 우리도 만 명만 탱크로 깔아 뭉개면 쥐 죽은 듯 조용해질 것”이라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부도덕한 인물로 그려진다. “반인반신”(남유진)이나 “헌병대의 총탄이 날아오는 한강 인도교를 건너던 그때 이미 자기 운명의 찻잔을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다 재고 있었”던 “선악을 초극한 인간”(이인화) 같은 호들갑스러운 묘사에서 후광을 걷어내고 본 10.26의 순간은, 그냥 우스꽝스러운 부조리극이다. 마치 ‘프라하의 도살자’에게서 악신의 카리스마를 걷어내고 나면,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을 읽어보겠다고 말하며 얼간이처럼 웃다가 끝내 혼인빙자간음으로 해군에서 쫓겨난 라인하르트가 남는 것처럼.

물론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른다. 상대를 지나치게 비웃고 깔아 뭉개다 보면 자칫 위험을 실제보다 축소해 사람들로 하여금 방심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겠냐고. 하지만 생각해보라.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면 사람들은 쉽게 질서를 세울 힘을 그리워하고 초법적인 권력에 매료된다. 그 압도적인 카리스마라는 게 사실은 그처럼 너저분하고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의 뒤를 가려주기 위해 동원된 거짓이라는 걸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그 거짓 환상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조금 더 비아냥거리는 마음가짐으로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