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고: 예기치 않게 가족을 잃은 경험을 지닌 독자, 혹은 학교폭력에 노출되었던 경험을 지닌 독자의 경우 이 글을 읽거나 언급된 두 편의 영화(<죄 많은 소녀>, <살아남은 아이>)를 관람하는 일이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주의를 요합니다.

작은누나가 세상을 떠난 뒤 엄마와 나는 한동안 매일 성모상 앞에서 묵주기도를 드렸다. 스스로 세상을 떠난 이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가르치는 천주교회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그래도 남은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하면 누나의 영혼이 구원을 얻어 지옥이 아닌 연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차피 죽은 자에게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방법이 기도 말고 다른 게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1월에 세상을 떠난 누나를 위해 시작한 기도는 4월이 되어도 끝날 줄 몰랐다. 창 밖 나무들에 푸른 잎이 돋고 꽃이 피어나던 4월의 어느 날, 엄마는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엘리엇 시에 보면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이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다. 네 누나가 없어도 저렇게 꽃도 피고 잎도 푸르고 햇살도 따뜻하구나.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이. 열 다섯의 나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나만 아니었으면 누나가 저 꽃도 보고 잎사귀도 보았을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타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무던해지는 것도 쉽게 행복해지는 것도 다 무섭다. 내가 그랬다. “오늘따라 네 누나 낌새가 좋지 않으니 내가 정오 미사를 드리고 오는 동안 집 비우지 말고 있으라”던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집 앞 책 대여점을 다녀온 사이에 누나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후 오랫동안 나만 아니었다면 누나가 살아서 우리와 함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오래 지고 있었다. 물론 개중 웃는 날도 있고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날도 있었지만, 나 자신이 유족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누나의 죽음에 책임을 지닌 죄인이기도 하다는 무게는 10년 넘게 일상처럼 내 어깨를 짓눌렀다. 마치 <죄 많은 소녀>(2017)의 영희(전여빈)가, <살아남은 아이>의 기현(성유빈)이 그런 것처럼.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발버둥치다가도 어느 순간 그 모든 게 내 잘못이었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모질게 구는 일을 반복했다.

경민(전소니)의 실종 뒤에 가려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들의 움직임으로 시작하는 <죄 많은 소녀>와 달리, <살아남은 아이>는 이미 은찬(이다윗)을 추모하는 첫 단계가 모두 마무리된 자리에서 시작한다. 함께 물놀이를 갔다가 물에 빠진 친구 기현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바친 은찬은 의사자 지정이 되었고, 외동아들을 잃은 아버지 성철(최무성)은 아들의 이름으로 장학기금을 만들며 부서진 가정을 다시 붙여보려 노력 중이다. 아들이 목숨을 걸고 살려낸 아이 기현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방치된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걸 발견한 성철은, 아내 미숙(김여진) 몰래 기현을 거두어 도배 일을 가르치며 보살핀다. 그러나 죽음을 극복하는 일이 이처럼 원만하기만 할 리가 없다. 은찬의 목숨값으로 살아난 기현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실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묻어둔 진실의 무게는 더 무거워진다. 미숙이 싸준 음식을 손에 쥐고 집 앞까지 왔다가 비틀대며 구토하는 기현은 안다. 죽음에 책임을 지고도, 그 사실을 숨긴 채 아무렇지 않게 살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을.

<죄 많은 소녀>에서 그 책임을 나누어 진 것은 경민 엄마(서영화)와 영희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잘못이 아니며 상대에게 잘못이 있다고 한사코 책임을 떠밀고 있지만, 그들의 절박함은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잘 아는 이들의 것이다. 상대의 죄가 더 커져야, 자신의 잘못을 잠시라도 잊고 감출 수 있으니까. 마지막 시퀀스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자해를 예고하거나 기도하는 경민 엄마와 영희의 몸부림은, 책임을 지고도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감추기 위한 애처로운 자기보호다. 얼핏 <살아남은 아이> 속 기현이 택한 방향과 정반대로 보이지만, 사실 두 영화는 살아남은 이들에게 남겨진 폐허가 새겨진 동전의 양면이다. 영희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든, 기현처럼 세상 사람들이 진실을 모르고 책임을 묻지 않든, 결국 책임을 가장 강하게 묻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며 그 질문에 대답하는 행위 없이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남은 사람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단언할 수는 없다. 목소리를 잃은 영희는 숨 쉬고 말하고 먹을 때마다 자신이 그토록 도망치려 했던 제 책임의 실체를 실감하게 될 것이고, 성철과 기현은 작업복에 걸어 둔 안전핀을 볼 때마다 은찬의 죽음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책임과 상실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것 또한 속죄의 한 방식이라 한다면, 남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일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겐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며 얻는 거짓 평안보다, 고통과 죄책감의 가시덤불을 통과하며 치르는 속죄가 치유의 길에 더 가까울 수 있으니까. 내가 그랬고, 기현이 그랬으며, 영희가 앞으로 그럴 것처럼.

<살아남은 아이>(2017)
감독
 신동석
주연 최무성, 김여진, 성유빈
시놉시스
아들 은찬을 잃은 성철과 미숙은 아들이 목숨을 걸고 구한 아이 기현과 우연히 마주친다. 슬픔에 빠져있던 성철과 미숙은 기현을 통해 상실감을 견뎌내고, 기댈 곳 없던 기현 역시 성철과 미숙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기현의 예상치 못한 고백은 세 사람의 관계를 뒤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