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델마>(2017)와 <스토커>(2013)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원치 않는 분들은 영화 관람 후 글을 읽기 바랍니다.

도서관에서 제 옆자리에 안야(카야 윌킨스)가 앉는 순간, 델마(에일리 하보)는 온통 뒤흔들리다 못해 발작한다. 일생을 욕망을 누르고 살 것을 교육받았을 테니, 욕망을 느끼는 법도 그에 반응하는 법도 배운 적 없었을 테다. 방법을 모르니 안으로 폭발할 밖에. 터지는 불꽃놀이처럼 형광등이 반짝이고, 통제 잃은 델마의 욕망에 전염되기라도 한 듯 새들은 도서관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죽는다. 물론 델마는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다. 감정을 다루는 기술을 배워본 적 없는 이들은, 생애 처음 느낀 감정 앞에서 일단 당황하기 마련이다. 이건 뭐지? 이 감정은 대체 뭐지?

델마의 아버지 트론드(헨릭 라파엘슨)가 취한 행동들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델마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현실태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너무 특출해서,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제어하면 좋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겁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트론드는 딸에게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욕망 자체를 거세해버리는 쪽을 택한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뷔베카 룬드퀴스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약물로 신경을 잠재우고 세상 쪽으로 시야가 가는 걸 막았다. 델마에겐 입원 대신 독실한 신앙이란 방법을 택하긴 했지만 본질은 같았다. 그는 델마에게 절대자 앞에서 무릎 꿇고 제 죄인됨을 고백하라고 훈육했고, 어린 델마의 손목을 붙잡고 일렁이는 촛불 위에 손을 가져다 대며 이게 지옥의 고통임을 명심하라 말했다. 슬프게도 그 대가로 지옥의 고통 속에 갇힌 건 트론드다. 그런 트론드를 뒤로 하고, 델마는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간다.

제 힘을 깨닫고 집을 나서는 델마를 보면서, 나는 내가 아는 가장 기괴한 성장극 <스토커>의 주인공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를 떠올렸다. 화면에 등장하자마자 인디아는 다짐하듯 혼잣말을 한다. “내 귀는 남들이 못 듣는 것을 듣고, 내 눈은 남이 못 보는 작고 먼 것을 봐. 이런 감각은 오랜 열망의 산물이야. 구출되거나 완성되고 싶은 욕망. (중략) 이게 나야. 꽃이 제 색깔을 고를 수 없듯, 내가 무엇이 되든 그건 내 책임이 아니야. 그걸 깨달아야만 자유로워지고,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거야.” 우리는 인디아가 말한 “내 책임이 아니”라는 말 뜻을 정확히 모른 채 영화가 인도하는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스토커>는 인디아의 아버지 리처드(더못 멀로니)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제 아버지의 죽음이 남의 말 옮기기 좋아하는 이들의 입 위에서 가십으로 변질되는 걸 보고도 아무 말 못하는 인디아의 삶은 척 보기에도 갑갑해 보인다. 히스테리컬하게 나른한 어머니 에블린(니콜 키드먼)과 불쾌해도 노골적으로 티를 내면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모럴이 지배하는 동네, 자신을 옭아매는 유무형의 억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인디아는 아직 모른다. 뭔가 한 구석 비어 있는 것만 같은 인디아의 삶이 요동치는 계기는, 어딘가 희미한 폭력의 냄새를 묻히고 등장한 삼촌 찰리(매튜 굿)와의 조우다.

찰리는 리처드가 지켜왔던 인디아의 안전한 세계를 무너뜨리는 침입자이며, 동시에 인디아에게 본능을 터뜨리는 법을 알려주는 능숙한 선생이다. 인디아는 빠른 속도로 찰리의 방법을 배우다가 문득 자신이 아버지 리처드에게 배운 많은 것들 중 제 본능을 더 정밀하게 터뜨리는 방법도 있었다는 사실도 떠올려낸다. 자신을 가두며 가르쳤던 아버지는 죽었고, 자신을 증오하며 질투했던 어머니는 버렸으며, 자신을 부수며 가르쳤던 삼촌도 제 손으로 이겨냈다. 가부장과 유사 가부장의 그늘 밖으로 스스로 걸어나온 인디아에게 이제 세계는 사뭇 다른 공간이 될 것이다. 인디아는 언제든 제 본능대로 세상을 부술 수 있고, 그것도 아주 정밀하고 효과적으로 잘 부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런 본능을 가진 것도, 이 본능이 걷잡을 수 없어질 때까지 억압당한 것도 인디아의 책임은 아니다. 인디아는 그렇게 뒤틀린 채 어른이 된다.

<델마>를 보며 스티븐 킹의 <캐리>(1974)를 떠올린 사람들도 많겠지만, 성적 자각에 도달한 젊은 여성을 마녀로 모는 서사의 역사는 유구하다. 외부의 보호가 필요하던 어린 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제 욕망과 그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자각하고, 원한다면 새로운 생명을 생산할 수도, 생산을 거부할 수도 있는 힘을 지닌 존재가 된다. 이 압도적인 힘에 주눅이 든 이들은, 오랜 세월 여성에게 정조를 강요하거나 욕망은 죄악이라 가르치며 성적 자결권을 앗아가려 발버둥쳤다. 딸을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금욕적인 신앙을 택한 부모와, 그런 부모의 품 안에서 숨이 막히던 딸이 욕망을 자각하고는 자신이 받은 게 보호가 아니라 억압이었음을 깨닫는 서사.

난 내가 받아본 적 없는 유무형의 억압을 받으며 자랐을 수많은 내 또래 여자들의 삶을 생각한다. 지금도 문화적, 종교적, 생물학적, 사회적 근거를 조악하게 짜맞춰 여자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이야기를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럴수록 나는 웃으며 대학교정을 걸어 나가는 델마의 삶이, 삼촌의 차를 몰고 마을 밖으로 달려나가는 인디아의 삶이 궁금해진다. 함부로 자신을 가로막고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가볍게 부숴버릴 수 있는 여자들의 삶이. 여자아이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는 결국 더 큰 파국으로 이어질 것이다.

<스토커>(2013)
감독
 박찬욱
각본 웬트워스 밀러
주연 미아 와시코브스카, 매튜 구드, 니콜 키드먼
시놉시스
18살 생일날 갑작스런 사고로 아빠를 잃은 소녀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  그녀 앞에 존재조차 몰랐던 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찾아온다. 남편의 죽음으로 신경이 곤두서있던 인디아의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먼)은 젊고 다정한 찰리에게 호감을 느끼며 반갑게 맞아주고 인디아는 자신에게 친절한 삼촌 찰리를 경계하면서도 점점 더 그에게 이끌린다. 매력적이지만 수수께끼 같은 존재인 찰리의 등장으로 스토커가(家)에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인디아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하고 인디아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충격적인 비밀들이 드러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