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SC00705.ARW* <블랙미러> 3시즌 4화 ‘샌 주니페로’와 4시즌 6화 ‘블랙 뮤지엄’,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핵심적인 스포일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샌 주니페로’와 ‘블랙 뮤지엄’ 두 화를 다 보고 난 뒤 생각이 조금은 복잡해졌다. 인간의 의식을 추출해 디지털 가상공간으로 업로드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TCKR사가 존재하는 그 세계에서는, 육신의 사망이 더 이상 사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신이 사망하더라도 의식만큼은 살아서 가상공간 안에서 일상을 영유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블랙미러>의 작가진은 스토리 전개의 편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설정은 설명하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간다.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추출해내는가 하는 점 말이다. 인간의 의식과 생체정보를 디지털화하는 기술을 개발한 건지, 그렇다면 그 의식을 추출해내고 난 인간의 몸은 빈 껍데기가 되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뇌에 저장된 기억과 사고방식, 시냅스 구조 정보를 디지털로 구현해서 의식을 ‘복사’하는 건지, <블랙미러>는 그 원리를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설정의 구체적인 정보를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있다면 SF작가가 아니라 과학자일 것이다. 어슐러 K. 르 귄도 앤서블이 정확하게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건지 설명하지 않았고, 아이작 아시모프도 <최후의 질문>을 쓰면서 어떻게 앤트로피를 역전시킬 수 있는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TCKR사의 기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블랙미러>의 설정은 윤리적인 질문을 남긴다. 디지털로 추출된 인간의 의식을, 육체 안에 담겨 있던 의식과 같은 인격이라고 볼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만약 TCKR사의 기술이 인간의 몸에서 의식을 추출하는 게 아니라 의식을 구성하는 각종 정보들을 복사해 디지털로 재구축하는 방식이라면 – ‘블랙 뮤지엄’을 끝까지 보고 나면 그런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 우리는 그 디지털 의식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까? 우리의 사본? 그 사본을 복사해 낸 직후 육신이 죽으면, 살아남은 건 우리의 의식인가 아니면 우리의 사본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구성되느냐”는 질문은 SF뿐 아니라 인류 전체가 스스로 물어온 오래된 질문이다. 학습능력과 유추 연산 능력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건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는 순간 증명됐고, 구글이 구글 IO 2018에서 선보인 구글 듀플렉스는 사람의 말투와 사람의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흉내 내어 전화통화를 하는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눈다. 인간 개개인이 지닌 개별적인 기억이나 취향 같은 것들이 인간을 구성하는 핵심정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인간의 기억과 취향이 얼마나 쉽게 변질될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건 굳이 IT 산업의 동향까지 꺼내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간단한 암시 몇 마디만으로도 없던 일을 기억해내고 겪었던 일을 망각하는 동물 아닌가. 그렇다면 기억(메모리)과 사고방식(OS)을 인간의 그것 수준으로 탑재한 인공지능에 자유의지를 부여하면, 우린 그걸 인격으로 봐야 하는 걸까?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를 영화화한 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가 탐구했던 주제도 바로 그것이었다. 인간과 같은 육신을 지니고,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기억을 축적할 수 있는 리플리컨트들은 단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존재라는 이유 하나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다. 도망친 리플리컨트들을 잡아 강제로 ‘퇴역’시키는 궂은 일을 전담하는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는, 제 눈 앞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하고는 스르륵 잠들 듯 숨을 거두는 로이 배티(룻거 하우어)를 보며 혼돈에 빠진다. 어쩌면 레이첼(숀 영)이 리플리컨트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순간부터 이미 데커드의 세계는 어지러웠을지도 모른다. 인간과 리플리컨트 사이의 온갖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준은 모호하기 짝이 없고, 데커드는 근본적인 회의감에 휩싸인다. 리플리컨트들을 잡아 퇴역시키는 나는, 내가 인간인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35년만에 나온 후속작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비전은 더 암울하다. 블레이드 러너로 근무 중인 K(라이언 고슬링)는 자신 또한 리플리컨트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동족들에게는 ‘동족을 잡아 죽이는 인간의 개’라는 비아냥을 듣고, 인간들에게는 ‘껍데기’라는 멸칭으로 멸시당한다. K는 시 외곽에서 출토된 리플리컨트의 유골에서 임신과 출산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생산된 것이 아니라 출생한’ 최초의 리플리컨트를 추적해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어쩌면 그 아이가 자신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자신에게는 이식된 기억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정말 직접 겪은 것만 같은 기억이 있으니까. 디지털 AI 애인인 조이(아나 드 아르마스)도 K를 부추긴다. 자기는 특별한 존재야. 다른 이들과는 달라. K는 제 머릿속을 맴도는 기억이 이식된 가짜가 아닌 진짜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감독 드니 빌뇌브는, 모호한 결말로 해석의 여지를 겹겹이 쌓아올리며 SF 영화의 고전이 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를 충실히 계승한다.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끝까지 다 보고 난 뒤에도 우리는 몇몇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안고 극장을 나설 수밖에 없다. K를 부추기던 조이의 말과 행동들은 출시 당시부터 그렇게 행동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것일까, 아니면 조이가 K와 함께 지내면서 습득한 개성과 정보들로 구축한 개별적인 인격의 산물인 걸까. 만약 후자라면, 조이가 ‘샌 주니페로’ 속 켈리(구구 음바타 로)와 요키(맥켄지 데이비스)와 크게 다를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기억을 축적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인간만의 특권이라 믿는 우리의 오만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p.s.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아직 안 본 관객이라면, 영화를 주의 깊게 보시라. 어쩌면 샌 주니페로 주민 중 반가운 얼굴을 영화 속에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감독
 드니 빌뇌브
주연 라이언 고슬링, 해리슨 포드
시놉시스
인간과 리플리컨트가 혼재된 2049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리플리컨트를 쫓는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는 임무 수행 도중 약 30년 전 여자 리플리컨트의 유골을 발견하고 충격적으로 출산의 흔적까지 찾아낸다. 리플리컨트가 출산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에 큰 혼란이 야기되므로 이를 덮으려는 경찰 조직과, 그 비밀의 단서를 찾아내 더욱 완벽한 리플리컨트를 거느리고 세상을 장악하기 위해 ‘K’를 쫓는 ‘니안더 월레스’(자레드 레토). 리플리컨트의 숨겨진 진실에 접근할수록 점차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K’는 과거 블레이드 러너였던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만나 전혀 상상치 못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