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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두 사람을 만났다. 공교롭게 둘 다 대학교수였다. 먼저 만났던 사람은 캐나다 출신 아서 프랭크다. 그와 얘기를 나누다 서로 닮은 점을 발견했다. 작지 않은 질환을 앓았다는 것. 심장병과 고환암이 있었다는 그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질병 경험을 들려주었다.

“고통은 알아봐 줄 때 줄어들어요. 그런데 내가 만난 의료 종사자들은 내 고통을 들여다보기는커녕 고통을 말할 기회조차 차단했죠.” 나도 같은 경험을 했다. 의료진은 내 신체를 치료할 뿐, 두려움에 떠는 내 정서를 돌보는 데는 무심했다. 오히려 내가 말하고 질문할 때마다 귀찮아하면서 진료 시간을 줄이는 데 관심이 많은 듯했다. 이런 경험을 들어 맞장구치자, 프랭크 교수가 말했다. “사실 다 그렇진 않았어요. 한 의사가 진정 어린 눈빛으로 ‘많이 걱정되네요’라고 말하며 나를 보던 몇 초에 구원받기도 했지요.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 마음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되는 연습을 오래 해왔겠죠, 아마.” 이날의 긴 대화는 여러 생각 거리를 던져주었지만 유독 두 개의 단어가 남았다. ‘고통’과 ‘마음’.

며칠 후 만난 다른 한 사람은 김승섭 교수였다.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사회역학 연구자다. 그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 연구,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실태조사 등을 진행했다.

김 교수가 말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아이가 유치원 버스에 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빠가 경찰진압 때 버스에서 심하게 구타당하는 걸 봤던 게 트라우마가 된 거죠. 버스 계단에 발 올리는 걸 그리 어려워했던 그 아이의 가슴속에 들어 있을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람,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 씨가 전기 끊겼던 밤에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게 가능한 삶으로 저를 끌고 가고 싶어요.” 의대에 간 김 교수가 벌이가 나은 임상 의사가 아닌 역학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던 건, 타인의 ‘고통’에 ‘마음’ 쓰는 일을 멈추지 못했고 그 마음 쓰는 일을 계속 멈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에 마음 쓸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덜기 위해 머리를 쓰고 방법을 찾는다. 그렇게 마음은 세상에 꼭 필요한 지식과 행동에 선행한다.

‘고통’과 ‘마음’을 말했던 두 사람 모두 아픈 것을 성격이나 습관 같은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경향을 비판했다. 그것은 나쁜 노동 조건이나 혐오와 차별, 환경오염 같은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회적 조건을 가린다. 프랭크 교수는 말했다. “아픈 사람은 자기 병에 책임이 없어요. 아픈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면 그건 자기 고통을 목격하고 표현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게 하는 거예요.” 환자가 아닌 사람은 ‘아직’ 아프지 않은 사람일 뿐이다. 여기서 ‘환자’ 자리에 ‘소수자’를 넣어도 무방하다. 김 교수의 말 대로 우리 모두는 한국만 떠나도 소수자이며, 한 사회의 소수자는 마음이 아파 몸이 아프다. 프랭크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아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인간이기에 겪는 고통을 나도 겪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거죠.”

김승섭 교수는 “우리는 연결될수록 건강한 존재”라며, 학계에서는 사회적 관계가 건강과 수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상식이라 했다. 이때의 관계라는 건 나의 고통에 마음 써주는 사람의 존재일 것이다. 좋은 사회적 관계는 좋은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고, 좋은 사회는 좋은 정치와 운동이 만든다. 하지만 그걸 알리바이 삼기보다 우선 내 눈과 귀와 손이 닿을 거리에 있는 고통에 마음 쓰는 연습을 해보기로 한다. 고통스럽겠지만.

『아픈 몸을 살다』

지은이
아서 프랭크 / 옮긴이 메이 / 출판사 봄날의책 / 출간일 2017-07-11 / 원제 At the Will of the Body (1991)

『아픈 몸을 살다』는 아서 프랭크가 자신의 질병 경험(특히 암)에 대해 쓴 개인적인 에세이다. 사회학 교수로 젊고 건강했던 저자는 39세에 심장마비를 겪고 그 다음 해에는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가 수술과 화학요법을 통해 회복한다. 질병이 가져오는 상실과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그저 피해자의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또한 모든 어려움을 용감하게 극복해낸 흔한 질병 서사의 영웅 이야기도 아니다. 위험과 기회, 고통과 축복, 위기와 새로 얻은 삶 등 모순되는 요소들을 또렷한 비전을 가지고 함께 엮어 말하기 때문에 영적 차원의 울림도 크지만 ‘신이 주신 질병으로 삶이 변화되었다’ 식의 간증과도 거리가 멀다. 세속적이고 평이한 용어들로 질병으로 인해 얻을 수 있었던 깊이를 드러냈다는 점이 이 책의 커다란 미덕이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지은이
김승섭 / 출판사 동아시아 / 출간일 2017-09-13

사회역학자인 김승섭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차별 경험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야기한다. 차별이나 폭력을 겪고도, 말조차 하지 못할 때, 혹은 애써 괜찮다고 생각할 때 실은 우리 몸이 더 아프다는 것을 연구들은 보여준다. 김승섭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몸은 정직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고용 불안, 차별 등 사회적 상처가 어떻게 우리 몸을 아프게 하는지, 사회가 개인의 몸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사회역학의 여러 연구 사례와 함께 이야기한다. 저자는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몸과 건강을 어떻게 바라보고,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다. 최첨단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유전자 수준에서 병을 예측하고 치료하는 게 가능해지더라도, 사회의 변화 없이 개인은 건강해질 수 없다고 말이다.